•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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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머지않아 열매 맺을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이형기 시인이 지은 <낙화>라는 시를 단락 구분 없이 소개한 전문(全文)입니다. 
  경남 진주 출신의 이형기(1933-2005)는 고등학생이던 17세에 당대의 기라성 같은 문인들의 추천으로 정식으로 등단한 천재 시인이었습니다. 앞서 소개한 시 <낙화>는 그가 20살이 되던 해 지은 시로 알려졌습니다. 같은 소재로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둘 스러지고”로 시작하는 조지훈의 <낙화>와는 또 다른 감성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이런 시를 약관의 나이에 지었다니! 부러움 반 존경의 마음 반,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를 얼마나 읊고 다녔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시가 나온 때는 전쟁의 상흔이 절정이던 1953년이었습니다. 청년 시인은 길가에 아무렇게나 놓인 시신을 까마귀들이 와서 파먹던 시대의 참상을 “내 영혼의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던 걸까요? 말년에 뇌질환으로 고생했던 시인은 “고통과 고독은 시인의 양식”이라는 말을 남기고, 자신이 사랑했던 시구처럼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꽃답게 죽었습니다.
  창조주의 섭리와 경륜 앞에 가야할 때가 언제인지를 분명히 알고 아름답게 퇴장하지 않는 피조물이 없습니다, 인간을 제외하고는;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질 때가 있습니다(花無十日紅). 계절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서(酷暑)도 혹한(酷寒)도 가야할 때를 압니다. 하지만 인간만은 가야할 때가 되었음에도 깨닫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가야할 때를 알면서도 떠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가야할 때를 알고, 가야할 때 깨끗이 떠나는 자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을 보십시오.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그 출생을 예언했으며(눅 1:13),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자요(막 1:9), 땅의 임금 헤롯 왕도 두려워하는 민중의 선지자였고(마 14:5), 안드레와 베드로를 비롯한 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스승이었습니다(요 1:35). 그러나 예수가 등장하자 요한은 거짓말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립니다. 어찌 요한뿐이겠습니까? 모름지기 예수를 믿는 자라면, 항상 가슴 속에 신령한 사표(辭表)를 간직하고, 주님을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을 각오와 자세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이것이 창조주께서 피조물인 인간에게 정해주신 사람다운 사람이 살아가는 길이 아닐까요? 인간이 탐욕과 집착 때문에 가야할 때를 모른 척하고, 가야만하는 당위성을 홀로 부인할 때만큼 추할 때가 없는 법입니다. 스스로 위난을 자초한 경우라면,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위치에 놓인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셰익스피어가 쓴 희곡 중에 <끝이 좋으면 다 좋아(All's Well That Ends Well)>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원작은 좀 다른 내용입니다만,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박수칠 때 떠날 수 있다면 조금은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을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신학도 마찬가지요, 정치도 마찬가지요, 인간사 모든 일이 아름다운 계절 가을을 닮아 꽃답게 마무리할 수만 있다면, “까마득한 하늘가에 내 가슴이 파랗게 부서지는 날 코스모스는 지리”(이형기, <코스모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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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낙화(落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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