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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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전에 세상을 떠난 고(故) 최태민 목사의 망령이 되살아나는가! 그의 그림자가 사위와 자식들, 정치계에서 나풀거리고 있다. 최근 그에 관한 가족사의 얽힌 이야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무성하게 되살아나고 있어 교계차원에서 재조명하고자 한다.
한동안 잠잠했던 故 최태민 목사의 이름이 등장한 것은 그의 딸 최순실(59세) 씨의 미르재단와 K스포츠 재단 이름이 입에 오르내리면서이다.
그가 승려에서 목사로 변신하기 까지의 비하인드 스토리을 말할 것 같으면 대개 이러하다.
△故 최태민 목사의 정체는? 
지난 40년 가까이 박근혜 대통령과 최태민 목사와의 관계에 대한 의혹이 여론의 도마에 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는 과거 1974년을 거슬려 올라간다. 육영수 여사가 흉탄에 쓰러진 후 퍼스트 레이디 구실을 하던 박근혜는 ‘새마을 봉사단’ 명예총재라는 직함이 제기될 때부터 줄곤 따라붙어 다녔다.
혜성과 같이 교계에 나타난 최태민 목사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 비주류 계통의 종합교단이라는 곳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신학교도 제대로 안 나왔다. 최태민은 구국봉사단 총재 이름으로, 그리고 박근혜는 명예총재라는 타이틀 때문에 교계에 어필되었다.
구국봉사단이 새마을운동과 더불어 새마음운동으로 개명되고 그의 후신인 근화봉사단을 꾸려 일반 대중속에서 무료 의료치료 등의 봉사활동을 펼친 것이 국민들에는 신뢰를 얻어 회자 되기도 했다. 그당시 박근령과 대립됐던 육영재단과의 분란의 배경의 요인도 1990년도 신문 지면까지 보도되었다. 1998년 박근혜가 국회의원이 된 뒤에는 최태민의 사위 정윤회(최순실의 남편)가 비서실장이란 호칭을 달고 등장 할 때부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2004년 박근혜가 당 대표가 되면서 정윤회는 종적을 감췄지만 2007년 경선 때에도 그가 박근혜의 비선 조직을 이끌며 핵심 측근으로 중심에 있었다는 소문도 자자했다. 
최태민은 1975년 4월 29일 대한구국선교회<1976.12.10> 구국봉사단 1979년 5월 1일 새마음봉사단의 총재에 나선다. 1963년 5월 민주공화당 중앙위원으로 첫 정계에 발을 디딛고, 전국불교 청년회 부회장, 1951년 3월 대한행정신문사 부사장 1947년 4월 인천경찰서 사찰 주임 경위 등이 그의 과거 이력 전부이다.
최태민의 교계이력은 1945년 4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종합총회로부터 목사안수를 받은 뒤부터 목사라는 호칭이 그때부터 따라 붙는다. 그의 수사 자료를 보면 한때 불교 승려가 되었고 천주교 영세까지 받았다. 태민이란 이름도 7번째 쓴 가명이기도 했다. 
그는 1912년 황해도에서 태어나 1942~1945년까지는 황해도 도경의 순사였다. 
월간조선 <2007년 7월호>에 의하면 최태민은 6명의 부인으로부터 모두 3남 6녀의 자녀을 둔 그의 가계도를 제시 한 바 있다,
1970년대에 들어 와서는 서울과 대전 일대에서 난치병을 치료한다는 등 사이비 교주행각을 벌였다. 불교, 기독교, 천도교를 종합했다는 교리를 내세워 방민이란 가명을 쓰면서 권자경 칙사 또는 태자마마라는 호칭도 쓰고 다녔다. 
△박근혜와의 첫 만남
최태민이 박근혜를 만난 것이 이 무렵이다. 최태민이 박근혜에게 보낸 ‘김형욱 회고록’에 공개된 편지의 내용은 이러하다
‘어머니는 돌아가신게 아니라 너의 시대를 열어주기 위해 길을 비켜주었다는 것을 네가 왜 모르느냐, 너를 한국을 나아가 아시아의 지도자로 키우기 위해 자리만 옮겼을 뿐이고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싶을 때 나를 통해 항상 들을 수 있다’ 故 육 여사가 꿈에 나타나 내 딸이 우매해 아무것도 모르고 슬퍼만 한다면서 이런 뜻을 전해달라는 내용으로 접근한 것이다. 이른바 ‘현몽’으로 전하는 그의 본심은 한번 만나 주길 바란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1975년 3월 6일 최태민을 청와대로 불러 대화를 나눈 것이 첫 만남이었다. 물론 그의 아버지 박정희도 동석해서 만났다. 
1993년 11월 월간중앙지에 목사직을 돈 주고 샀다는 것이 교계 관계자의 주론이나 이 사실은 확인된 바가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목사안수는 그 당시 종합총회교단(합동비주류 100여개가 넘어)에서 받았다고 하지만 지금은 없어진지 오래다. 다만 그가 신학교 에서 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는 점이다. 
최태민 목사는 대한구국봉사단을 발족하고 스스로 총재에 취임했고 5월 임진강에서 구국기도회를 열면서 박근혜를 명예총재로 그 자리에서 즉시 제안하여 추대가 된다. 
그리고 전국 중요 도시에 구국봉사단, 구국의료봉사단을 조직하여 부산에서도 그 지부가 동구 초량동 어느 폐교에 간판을 걸고 부산교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 당시 박영수 부산시장이 나오고 부산지부장에는 변창남 목사가 나섰다. 지금까지 인연으로 발을 딛고 내려온 것이 사단법인 한국경로복지회로 노인들을 상대로 재가복지사업에 뛰어들어 성공한 사례이다.
그 뒤 최태민은 합수부가 진행하는 수사를 받았고, 당시 전두환 지시로 수사를 맡았던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은 ‘신동아’(2007년 6월호) 인터뷰에서 최태민은 강원도 어느 군부대로 보내 활동하지 못하도록 조용히 자숙하도록 했고, 새마음봉사단은 1980년 11월 강제 해산 당했다고 했다. 
그의 딸인 최순실 이사장이 지금 정치계에 등장한 것도 다 이런 그의 아버지의 배경일지는 몰라도 소문에 꼬리를 물고 아버지의 망령이 되살아 나는 것 같다고 모두들 입을 모아 말하고 있다. 
최태민은 이후 서울 역삼동 자택에서 칩거한 후 1994년 노환으로 하늘나라로 갔다.

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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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최태민 목사가 남긴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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