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나는 당신만 믿는다.”, “나만 믿어”라는 말을 많이 한다. 교회에서도 “믿습니까?” “믿습니다”라는 말과 성경에서도 ‘믿음으로 의에 이른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믿음이 세상을 이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등의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나를 믿어라.”와 “믿습니다”의 믿음과 성경에 나오는 ‘믿음’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것이다.
‘믿습니다’의 믿음은 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며 믿음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이용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에게 “나는 너를 믿는다.”라고 할 때 이 말은 자녀가 부모의 뜻대로 따라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에 자녀를 얽어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잘 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하는 것도 믿음을 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믿음이란 진리를 시인하고 진리대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말은 예수께서 주님과 하나님, 구원자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시인하고 예수께서 명하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이 믿음에는 믿음을 이용하여 무언가를 얻으려는 것은 없고 도리어 내가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성경 마가복음에 예수께서 시장하실 때 무화과나무가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것을 보시고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하셨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에 무화과나무가 뿌리 채 마른 것을 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되리라”하셨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수많은 종교적 행사는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집인 예루살렘 성전은 종교권력과 이권다툼으로 강도의 소굴이 되었으며, 최소한의 선도 없는 뿌리부터 썩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회복한다면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할 수 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근본을 놓치지 말라는 말씀이다.
한국교회는 수십 년간 믿음을 내 목표를 이루어내는 수단으로 사용해 왔다. 어려서 교회에서 부흥회할 때면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주님 믿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 고 했다. 연 초나 병 고침을 받는 기도원에서도 ‘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믿음이 부족하다. 믿음이 없다’하면서 죄책감에 사로잡혔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믿음은 전혀 이런 것이 아니다. 믿음은 내 원하는 것을 얻는 도구가 아니라 어떤 환경에 쳐해 있든지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진리의 말씀대로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다.
나무를 살펴보면 나무속에 생명과 사랑과 좋은 것들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생명, 사랑, 좋은 것들이 나무의 형체 안에 담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나무는 그늘로, 향기로, 새들의 보금자리로, 열매로 주변에 선을 베풀고 있다. 이처럼 믿음에는 진리가 있어야 하며 그 진리 속에는 생명인 사랑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랑과 진리를 담고 있는 믿음은 반드시 선한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만약 이 셋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그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이 된다. 예수께서 마지막에 ‘불법이 성함으로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의 마지막 날이란 믿음이 있노라하면서 불법을 행하거나 믿음에 사랑이 없거나 그 믿음이 선한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날 즉 믿음을 잃어버린 날일 것이다.
믿음은 누구를 이용하여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직하고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사랑하고 선을 행하고 밝고 당당하고 힘이 되어주고 자유를 만들어주는 삶을 살면서 믿음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믿습니다’의 믿음은 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며 믿음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이용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에게 “나는 너를 믿는다.”라고 할 때 이 말은 자녀가 부모의 뜻대로 따라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에 자녀를 얽어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잘 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하는 것도 믿음을 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믿음이란 진리를 시인하고 진리대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말은 예수께서 주님과 하나님, 구원자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시인하고 예수께서 명하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이 믿음에는 믿음을 이용하여 무언가를 얻으려는 것은 없고 도리어 내가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성경 마가복음에 예수께서 시장하실 때 무화과나무가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것을 보시고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하셨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에 무화과나무가 뿌리 채 마른 것을 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되리라”하셨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수많은 종교적 행사는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집인 예루살렘 성전은 종교권력과 이권다툼으로 강도의 소굴이 되었으며, 최소한의 선도 없는 뿌리부터 썩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회복한다면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할 수 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근본을 놓치지 말라는 말씀이다.
한국교회는 수십 년간 믿음을 내 목표를 이루어내는 수단으로 사용해 왔다. 어려서 교회에서 부흥회할 때면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주님 믿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 고 했다. 연 초나 병 고침을 받는 기도원에서도 ‘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믿음이 부족하다. 믿음이 없다’하면서 죄책감에 사로잡혔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믿음은 전혀 이런 것이 아니다. 믿음은 내 원하는 것을 얻는 도구가 아니라 어떤 환경에 쳐해 있든지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진리의 말씀대로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다.
나무를 살펴보면 나무속에 생명과 사랑과 좋은 것들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생명, 사랑, 좋은 것들이 나무의 형체 안에 담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나무는 그늘로, 향기로, 새들의 보금자리로, 열매로 주변에 선을 베풀고 있다. 이처럼 믿음에는 진리가 있어야 하며 그 진리 속에는 생명인 사랑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랑과 진리를 담고 있는 믿음은 반드시 선한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만약 이 셋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그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이 된다. 예수께서 마지막에 ‘불법이 성함으로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의 마지막 날이란 믿음이 있노라하면서 불법을 행하거나 믿음에 사랑이 없거나 그 믿음이 선한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날 즉 믿음을 잃어버린 날일 것이다.
믿음은 누구를 이용하여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직하고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사랑하고 선을 행하고 밝고 당당하고 힘이 되어주고 자유를 만들어주는 삶을 살면서 믿음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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