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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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동안 필리버스터(Filibuster)가 세간의 화제였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국회에서 합법적으로 이루어지는 ‘의사 진행 방해 연설’쯤 되겠습니다. 테러방지법 상정을 놓고 2월 23일부터 시작된 야권 국회의원들의 필리버스터 행진은 39명의 참여 인원이 192시간 동안 발언한 후 지난 3월 2일 마침내 끝이 났습니다. 이 과정에서 숱한 기록들이 갱신되었는데, 그 중에는 1964년 의원 신분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5시간 19분 기록이 있는가 하면, 1969년 신민당 박한상 의원이 세운 10시간 15분 최장 시간의 기록도 있고, 2011년 캐나다 의원들이 세운 58시간 연속 기록도 있습니다. 한편 같은 기간 동안 국회 본회의장에 일반 방청객들이 쇄도하고 국회 TV 시청률이 폭주하는 진기록이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이번 필리버스터 사건을 보면서 ‘세렌디피티(Serendipity)’를 다시 한 번 떠올립니다. ‘우연한 발견 혹은 성공’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세렌디피티와 이번 필리버스터는 작년 8월 국내에서 방영된 ‘어셈블리’라는 드라마를 매개로 연결됩니다. 극중에서 노조위원장 출신인 진상필 의원은 정략적인 판단에 따라 여당 추천 후보가 되어 보궐선거에 나가 당선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비리 많은 국무총리후보자의 임명 동의안을 놓고 홀로 필리버스터를 시작합니다. 극중에서 진상필 의원이 남긴 기록은 25시간 2분, 이는 1957년 미국 스트롬 서먼드(James Strom Thurmond) 상원의원의 24시간 18분 최장 기록을 깨뜨리는 상징적인 숫자로 쓰였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의자에 앉는 것도 화장실 가는 것조차도 금지되는 상황에서 만 하루를 넘기도록 계속해서 말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고역(苦役)입니다. 더군다나 여당 소속 의원이면서 동조자 한 명 없이 홀로 필리버스터를 단행하고 결국 법안 통과를 저지한다는 상당히 비현실적인 가정이었지만, 적어도 그 비현실성만큼은 이번 사건으로 실제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결과를 도외시하더라도,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1939년 미국에서 독특한 영화 한 편이 개봉되었습니다. 어쩌면 한국 드라마 어셈블리가 오마쥬(Hommage) 했을지 모르는 이 영화의 제목은 <스미스 씨 워싱턴에 가다(Mr. Smith Goes to Washington)>, 명장 프랭크 카프라(Frank Capra) 감독에 제임스 스튜어트라는 명배우가 주연을 맡은 명품입니다. 영화 속에서 소년단(Boy Rangers) 단장인 순박한 시골뜨기 제임스 스미스는 지역 상원의원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역시 정략적인 판단에 따라 상원의원직에 임명됩니다. 그가 상원의원이 된 이유는 단 하나, 노회한 정치가들이 추진하던 댐 건설 사업에 한 표 보태라는 무언의 압력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린이들을 위한 야영장을 짓는 꿈에 부풀어있던 순박한 의원 스미스 씨는 마음씨 착한 비서 아가씨의 도움으로 필리버스터를 알게 되고 결국 24시간에 걸친 의사 진행 방해 발언을 통해 정치꾼들의 야욕을 분쇄합니다. 비디오 대여점 한 구석에서 그야말로 우연히(세렌디피티) 발견한 영화였는데 보는 내내 너무 큰 감동을 받아 그 이후로도 서너 번 더 보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어떤 법안을 통과시키려는 편이 있고 그것을 막으려고 하는 편도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국민들 중에도 법안 지지파가 있고 필리버스터 지지파가 있지만, 정치판과 달리 어느 쪽도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대중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입니다. 걸핏하면 몸싸움을 벌이는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소개하던 대한민국 국회를 전 세계 언론들이 앞 다투어 긍정적인 뉘앙스로 대서특필하였습니다. 하기야 1980년대 혼돈의 시절 <스미스 씨 워싱턴에 가다>를 보면서 느꼈던 부러움이 더 이상 남 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니 그것만 해도 멋진 일이 아닙니까? 비관적인 전망과 온갖 억측을 일삼는 이 민족을 그래도 너무나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나라를 온전하게 발전시키는 일을 멈추지 않고 계신다, 이번 필리버스터를 바라보며 느끼는 소회(素懷)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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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필리버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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