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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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병원 원장직을 떠난 이유는?
장기려 박사는 1951년 7월 1일부터 1976년 6월 25일까지 부산 복음병원(현 고신대복음병원) 원장직에 있었다. 그는 “하나님과 사회, 여러분께 많은 은혜를 입었음을 감사드린다”면서 “나는 비겁하고 게을러서 재직시에 많은 과오와 무책임한 일을 저질러서 여러분께 폐를 많이 끼친 것을 용서해 주시기 바란다”고 복음병원 원장직을 떠나면서 <부산모임> 회지 1976년 7월호에 이렇게 겸손한 글을 올려 읽는 이로부터 아쉬운 눈물을 흘리게 했다. 25년간 이 기관에서 일을 한 것이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한지 모른다며 겸손함을 보였다.
1950년 10월에 영도 영선초등학교 서쪽 공지에 천막 셋을 치고 진료를 하면서 매일 피난민 100~200명의 환자를 전종휘 박사와 같이 진료했다. 인턴으로 그의 수제자 박영훈 장로가 경북의대에 들어가서 졸업을 앞둔 시기에 스승 장 박사를 뒷바라지 했던 것이다. 운영은 돈이 있는 환자에게는 진료비를 받고 없는 환자는 무료로 진료해 주는 방법으로 했다.
복음병원 원장직을 사임한 후 바로 서울의대 외과교수로 일하면서 복음병원을 옆에서 도왔다.
1974년 말이 되어도 새 원장을 모시려고도 않고 해서 1974년 말에 복음병원으로 다시 돌아왔었다. 다시 돌아온 후 현대병원을 발전시킨 것은 그의 제자 박영훈 의사와 故 정기상 검사실장의 공로가 컸다고 평소 말했다. 1965년 4월부터 서울 가톨릭의대 외과교수로 겸임하여 한달 반은 서울 성모병원에서 일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박영훈 의사 외 8명의 우수한 외과전문의를 배출시켰다고 말하였고, “아마 한강이남에서 외과 수술로는 박영훈 의사만큼 잘하는 의사는 드물 것이다”고 공개석상에서 칭찬했었다.
 
▲그런 제자와 스승의 관계가 무엇 때문에 끊겼을까?
복음병원과 복음간호전문학교를 세운 분은 장기려 박사다. 하지만 병원을 크게 키운 분은 그의 제자 박영훈 장로이며, 훗날 고신의과대학(고신대 의예과)을 세운 분은 박영훈 복음병원 제2대 원장임이 자타가 인정한다.
씨를 뿌린 것은 장기려 박사였지만 나무를 키워 육성시킨 것은 그의 제자 박영훈 장로이었으나 오늘에 와서는 그 열매를 따고 사회적 명성과 빛은 스승 장기려 박사에만 초점이 맞추어져있지, 박영훈이라는 이름은 그 스승 그늘에 가려져 있어 아무도 입 밖에 내어놓지 않고 있는 현실을 보고 스승을 짓밟고 그 스승의 자리를 탐낸 제자라는 오명을 씌워 박 원장에 대한 업적은 온데간데없이 묻어버렸을까?
하지만 역사의 진실은 사실에 입각해야 한다고 믿는다. 제자가 원해서 스승의 자리를 탐낸 것이 아니고 복음병원이 경영난 때문에 부득불 수술로 유명한 침례병원의 박영훈 의사를 모셔왔다. 20,000회 이상 수술을 집도한 박영훈 원장에 의해 고신의대가 신설되고, 병원 3동 건물을 완성할 수 있었고 천안 신대원의 자리를 매입 확보할 수 있었던 그의 공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의 스승 장 박사만 용비어천가를 불러대니 그의 가족 중 아내 목 권사는 어느 지인한테 “지금 집에서 허리가 아파서 바깥출입을 못하지만 온 세상에 박영훈 글자 하나 내세워주는 사람 없이 홀로 쓸쓸히 세월을 보내고 있으니 어찌 말년이 외롭지 않겠는가?”라고 하소연한 소리를 듣게 되었다. 고려학원 이사회(당시 이사장 이경석 목사)는 장 박사의 부실경영난의 책임소재로 원장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명예원장직의 직책만 갖게 했다. 그 당시 병원장 교체시기에는 부산의대 출신 의사(레지던트, 인턴) 등이 의국을 장악한 채 장 박사를 옹립했고, 박영훈 의사는 경북의대 출신이어서 결국 부산의대 대 경북의대 파워게임에서 부산의대 출신들이 대거 밀려났다.
병원을 떠나면서 장 박사는 “나의 복음병원 재직 말기에 일어난 직원 간의 불화, 이 사회의 불화는 나에게 큰 책임감과 더불어 새로운 사명을 깨닫게 하였으며 그 사명을 위하여 살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부산모임(1976년 7월호)에 게재하고는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시인했다.
 
▲장 박사는 말년에 무교회 모임에 가담했다
70~80년 전 평양 산정현교회의 장로였던 장 박사는 개인적으로 아주 보수주의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 월남 후 똑같은 이름의 부산산정현교회 장로로 시무했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여러 교파의 분열양상을 보고 그는 무교회 우치무라 간조, 야남이하라 타다오, 후지이 다케시를 존경하고 그러한 글을 애독하게 되어 주일마다 오후에는 병원 사택에서 무교회 성경연구 모임을 가졌다. 그래서 정든 부산산정현교회 원로장로직에서도 떠나 손정군 형제의 소개로 한국의 무교회 신자들을 사귀게 되었고, ‘작은 종들의 모임’을 주도해 가는 무교회주의자들의 모임에 발을 딛게 된 것이다. 만67세부터 만87세까지 1988년까지 21년간이나 정기적으로 간행된 <부산모임>에는 배후에 김서민, 조광조 선생의 협조가 컸다고 그가 말했다.
결국 한국교회가 부정하는 무교회주의에 신자가 된 장기려 박사는 신앙적인 면에서 기존 장로교 체제를 부정하는 교회를 떠난 영적 아픔을 감수하는 길을 걸었다. 기존 교회(부산산정현교회)의 정신적인 영향을 입혔다고 그의 담임목사였던 박광선 목사는 목회사역에 어려움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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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려 장로는 말년에 무교회주의에 심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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