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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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말 인도에서 라마누잔(Sriniv?sa Ramanujan, 1887~1920)이라 이름 붙여진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가난했지만 총명했던 소년은 15세 우연히 친구가 도서관에서 빌려다 준 『순수수학과 응용수학의 기초 결과 개요(A Synopsis of Elementary Results in Pure and Applied Mathematics)』라는 책 안에 있는 6천 개 가까운 정리를 독학으로 증명해 내었습니다. 이 노트 때문에 장학생으로 대학에 입학했지만 나중에는 마드라스 우체국 회계과에 근무하면서 수학 연구를 계속했다고 합니다. 캐임브리지 대학의 촉망 받는 교수 하디(Godfrey Harold Hardy, 1877~1947)는 그를 초청해 같이 연구를 진행하면서 놀라운 수학적 결과물들을 내놓았고 라마누잔은 영국 왕립학회 회원이 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하지만 일평생 수학 외에는 아무 것도 몰랐던 라마누잔은 향수병과 결핵병으로 32세의 나이에 요절합니다.
  라마누잔이 죽은 지 2년 후인 1922년, 서울에서 또 한 명의 수학 천재가 태어났습니다. 성장하여 경성제대 물리학과를 들어가 수석으로 졸업한 25세의 청년 이임학(1922~2005)은 공교롭게도 하디(G. H. Hardy)가 사망한 해인 1947년 남대문시장에서 우연히 미군이 버리고 간 미국 수학학회지 한 권을 발견합니다. 책 속에는 당대 최고의 수학자 중 한 사람이었던 막스 초른(Max August Zorn, 1906~1993)의 논문이 실려 있었는데, 거기에 초른 자신도 잘 모르겠다고 토로한 부분을 풀어서 보내자 미국 학회가 발칵 뒤집어진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런 인연으로 결국 미주(美州)로 건너간 청년은 자신의 이름을 딴 리군이론(Lee Group Theory)을 정립하는 등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과학기술 대표성과 70인’으로, 그리고 10월 말 언론이 그의 삶과 업적을 재조명할 때까지 라마누잔 스토리에 맞먹는 그의 기화(奇話)는 오랜 세월 초야에 묻혀 있어야 했습니다.
  이임학이 ‘리군이론’을 완성하기 직전인 1966년 소련의 레닌그라드에서 장차 수학의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릴 그리고리 페렐만(Grigori Y. Perelman)이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발군의 수학적 재능을 보여 스탠포드나 프린스턴 등 유수의 대학들이 교수로 청했으나 모두 거절하고 고향의 수학연구소(Steklove Institute of Mathematics)에 남아 연구하던 그는 2002년 11월 36세의 나이에 한 인터넷 저널에 논문을 하나 올림으로써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인터넷에 등장한 그 논문은 오랫동안 수학 7대 난제 중 하나로 불린 푸앵카레 추측(Poincare conjecture)을 증명해 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 보여준 페렐만의 행적은 기이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현상금 100만 달러를 거절했을 뿐 아니라 유럽학회상으로부터 수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상을 거부하고 학술원 추대마저 거절하며 철저히 은둔자로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는 지금도 고향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노모(老母)의 연금으로 생활하며 우주의 충돌이론 연구에 여념이 없다고 합니다.
  21세기에 수학이 주식이나 통계 심지어 마케팅에 이르기까지 쓰이지 않는 분야가 없을 정도로 발전하게 된 뒤안길에는 이처럼 그저 수학이 좋아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수학을 연구한 많은 천재들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도 이럴진대 교회는 어떻겠습니까? 성경 속에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님과 교회를 위해 섬기고 헌신하고 희생한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고 썼습니다(히 11:38). 이들이 흘린 땀과 피 위에 교회는 서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교인들은 세속적 명성과 영광뿐 아니라 교회에서마저 이름을 내려 하고 영예를 추구하는 성향을 보이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어느덧 결실의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7). 많은 것을 가졌으나 주 이외에는 배설물로 여겼던(빌 3:8) 사도의 고요한 외침이 이 가을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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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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