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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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포항중앙교회에서 65세 조기은퇴를 했다. 그 이유는 유별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목회관이며 개인적인 삶의 의미를 다듬으면서 기도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조기은퇴는 자랑할 것도 비판할 것도 아닌 그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 아름다운 관계개념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 교회에서 시무할 때를 제 1의 목회라 한다면 나는 지금 은퇴 후 제 2의 목회를 하고 있다.
나의 조기 은퇴에 대한 개인적인 소회(所懷)가 있다. 첫째는 헌법이 정한 정년을 어기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처럼 교회가 가장 건강하게 성장하고 목회가 가장 평행감축(平幸感祝)의 상황이 될 때 정년 관계없이 은퇴하고, 오늘의 세대에 맞는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갈 목사가 담임하게 될 때 더 교회는 성장하고 성숙하리라는 개인적인 교회관, 목회관이 조기은퇴를 결정하게 된 이유이며 그로 인하여 포항중앙교회가 지속적인 성장과 성숙을 이룩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둘째는 말씀사역의 중심이 시무교회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지만 은퇴 후에도 하나님이 주신 은사대로 전국 방방곡곡 부흥사경회를 인도하는 것 또한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시무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중대형교회 중심의 부흥사경회가 진행되어 농어촌 산골 개척교회를 섬길 기회가 거의 없었기에 은퇴 후에는 이 부분을 관점을 가지고 사역하고 싶었다. 이것은 불혹의 나이에 목사로 임직을 받을 때의 마음가짐의 하나였다.
그렇게 아름다운 제 2의 목회 그림을 그리고 감동과 축복으로 원로목사로 추대 받은 후 소설을 써도 그럴 수 없는 황당한 일을 겪었다. 내 삶을 다 쏟아 부은 牧會를 찬바람 부는 벌판 같은 凩會로 걸레처럼 만들어버린 사람들이 있었다. 이것이 조기은퇴의 보상인가 싶은 아픔이 깊어 잠간이지만 목회도 삶도 마른 나뭇가지 꺽 듯 하고 싶었지만 전도서 3:11절에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다.”는 말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숨을 몰아쉬면서 누가복음 22:51절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이것까지 참으라.”는 말씀을 읊조리면서 하루하루를 열고 닫았다. 그 중심에는 모해와 위증과 거짓과 인격살인과 말할 수 없는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원망 불평 비판 정죄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믿음을 지켰던 요셉과 다윗과 바울 사도의 신앙과 삶이 나에게 거울이 되었고 나 또한 그렇게 걸어가리라는 신앙적 결단과 고백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은퇴 후 한 주도 쉼 없이 작은교회의 초청을 받아 사역을 하면서 여기까지 이르렀다.
은퇴한지 5년, 고희(古稀)를 보내면서 20여년을 운전하지 않았던 내가 다시 운전대를 잡고, 아내와 함께 번갈아 운전하면서 다니다 보니 대형 사고도 당하여 목숨까지 위태로운 일을 겪기도 하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비빔밥 1인분 시켜 아내와 함께 먹으며, 커피 한잔으로 입맞추듯 나누어 마시며, 바퀴벌레 나오는 모텔에 잠을 자고, 그렇게 파주에서부터 해남까지 안 가본 곳이 없이 사역을 했다. 그러다가 종종 대형교회 부흥사경회 강사로 초청을 받고 현실적 위로를 받기도 한다. 그렇게 만감이 교차되는 제 2의 목회를 한 주도 쉼 없이 약속된 일정으로 헌신하면서 그야말로 눈물행전을 쓴다.
젊은이들은 도시로 다 나가버리고 교회를 지키는 산골 농어촌 교회의 어르신들의 예배상황은 청년 때 고향교회를 방문한 듯한 감정으로 눈시울이 젖으며 말할 수 없는 예배의 감동을 경험한다. 80이 넘으신 은퇴 장로님이 찬양인도를 하고 회중석의 가장 젊은 성도가 예순이 넘었다. 농어촌 산골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님 전도사님들의 목회 현장은 도시목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열악한 상황이지만 순박하고 성실한 목회현장의 사명수행의 면면이 온 몸으로 느껴지면서 내 눈은 저절로 젖어든다. 그렇게 은퇴 후의 말씀 사역은 대형교회 담임목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예배의 감동, 만남의 기쁨, 섬김의 축복, 헌신의 감격을 경험한다. 목회 현장이야 어딘들 다를 바 있겠는가? 때때로 주저앉아 일어설 기력도 없는 후배 목회자들에게 牧會와 凩會의 경험담을 들려주어 위로와 격려와 함께 새로운 목자로서의 정신자세를 회복하게 해 주고, 종종 사모님과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고, 내 품에 안고 축복기도를 하고, 점심식사 시간이면 국밥이든 국수이든 교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보면 시무했던 교회 목회추억이 떠오르고 그러다 보면 몇 숟가락을 뜨다가 밀려오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그냥 식탁에 엎드려 흐느껴 울어버리는 일도 있다. 그런 시간이면 서로가 말이 없지만 손을 잡아주면서 말 없는 위로와 사랑을 나누면서 진정한 교회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공유한다. 이 모든 감동과 행복은 은퇴후에 경험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다.
그렇다. 톨스토이가 만년에 쓴 ‘세 가지 질문’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때가 언제냐? 지금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이 누구냐? 지금 내가 만나는 그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이 무엇이냐? 지금 내가 만난 그 사람에게 선을 베푸는 것이다.>라는 깨우침을 나의 삶에서 실천한다는 것 보다 귀한 것은 없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작은자란 ‘지금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말한다. 그 사람이 밉든 사랑스럽든 나에게 유익하든 해악스럽던 그가 나를 필요로 할 때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나의 필요에 따라 가까이 했다가 필요치 않을 때 어김없이 멀리하고 아프게 하는 치졸스러운 삶에서 은혜와 사랑의 가치개념을 논할 수는 없다. 이해타산에 빠르고 주판 굴리는데 빠른 삶이란 십자가 사랑의 아름다움이 연주될 수 없다.
오늘도 해는 뜨고 진다. 겨울이 멀어지고 봄이 가까이 오고 있다.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까워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요즈음 내 삶이 얼마나 남아있을지는 모르지만 제 2의 목회사역을 어제처럼 오늘도 오늘처럼 내일도 감당하며 행보한다. 은퇴시에 언론사 인터뷰를 하면서 내가 들려주었던 ‘목사의 직무는 은퇴가 없습니다.’는 말을 오늘도 마음속으로 읊조리면서 이 번 주일도 몇십명 모이는 교회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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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칼럼] 제2의 목회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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