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곽삼찬 목사.jpg故 곽삼찬 목사(예장고신 증경총회장)
 
마산동광교회를 36년간 시무했던 故 곽삼찬 목사가 하늘나라로 간지 만 1주기가 된다. 유독 곽 목사에 대해서는 연민의 정을 느꼈던 필자로서 그가 남긴 아름다운 정신적 유산을 잊을 수가 없다.
곽삼찬 목사는 과거 경남노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故 송상석 목사에게 고신교단의 크고 작은 사건 사고마다 문제를 풀어나가고 수습하는 방법을 많이 배웠다고 필자에게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교단에 큰 어려움을 가져 왔던 고신대복음병원 법인이 관선 체제에서 탈피 할 때에 곽 목사가 고신 총회장에 재직했다. 그 때의 일이다. 2014년 여름 고려학원을 팔자고 한 김민남 관선 이사장과 몇몇 교단 인사들이 총회장 동의를 얻기 위해 마산동광교회로 곽 목사를 찾아왔다. 곽 목사는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는 한 그렇게는 할 수 없다”며 한마디로 잘라 돌려보냈다. 그러고 나서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 “어때요? 잘 했지요?”라고 말하던 곽 목사는 고려학원에 법인 이사장으로 있었던 연유도 있었으나 매우 애착을 가진 것으로 판단된다.
곽 목사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일이라면, 그 어떤 압력이 들어 와도 굽힐 줄 몰랐다. 그런 그의 배짱과 용기는 오랜 영성에서 묻어나온 신앙의 저력 때문일 것이다.
고려신학대학원을 천안으로 이전하고, 교지와 건물 짓는 것도 그의 끈기 있는 믿음의 행동이었다. ‘바르다, 옳다’ 하면 하나님께 기도하고는 저돌적으로 밀어 붙이는 행동목회가 그의 장점이며, 교단에 길이 남는 이정표가 되기도 했다.
곽 목사와는 반대로 고신의료원 시절 원장을 지낸 박영훈 장로는 정면에 대고 거절을 잘하지 못하는 분이었다. 그래서 고려신학대학원을 천안으로 옮기기 위해 대지 구입 계약금이 필요할 때마다 박 원장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곽 목사는 이사장으로서 명령을 구두로 내렸다. 행정처장인 김만규 장로에게 “계약금 얼마를 수표로 가져와라, 만일 안 가져 올 때는 인사상의 불이익을 당할 줄 알아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김만규 장로가 박 원장의 허락을 받아 계약금을 가져와 지금의 고려신학대학원이 착공 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공업자가 동광교회로 곽 목사를 찾아왔다. 시공업자가 곽 목사에게 돈 뭉치를 건네자 “어디서 함부로 매수하려고 하냐”면서 부실공사를 사전에 막아야겠다고 문전에서 돌려보냈다. 이 일로 신대원이 부실 공사가 되지 않고 잘 지어진 것을 오늘에서야 확인할 수가 있었다.
곽 목사는 평소, 자녀들 중에 복음병원 행정처장으로 있는 곽춘호 피택장로를 마음 한구석에 담아두고 있었다. 어떻게든지 아들이 잘 되기를 기도했다. 또 괴정제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잘 하기를 늘 소망한다고 필자에게 자주 말했다. 그렇게 기도를 부탁하던 곽 목사를 보면서 자식에 대한 애착은 누구나 동일하다는 생각을 했다.
곽 처장은 2013년도까지 고신의대 교무과장으로 15년 넘게 있었다. 그러나 김종인 장로가 이사장으로 온 뒤 병원 행정처장으로 전격 발탁했다.
필자는 곽삼찬 목사에게 빚을 지고 있다. 2000년도 고신 총회석상에서 본지를 향해 신문 불매 운동을 결의 한 사실이 있다. 기독교보 교단지에서 본지를 향해 소위 황색 신문으로 얼마나 매도하던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보도 했다. 그러나 곽 목사는 언론의 정도와 도의를 알았든지 총회 석상에서 “초교파 신문을 불매 운동하면 더 많이 읽히고 더 유명세를 만들어주게 된다. 그리고 언론과 싸우는 교단이 유치하게 비춰질 수 있으니 이를 해제하자”고 통 큰 발의를 하는 바람에 족쇄가 풀리게 된 사연이 있다.
옳고 그른 것을 분간 할 줄 아는 곽 목사는 동광교회가 둘로 갈라질 때도 중립을 지켰다. 어느 쪽에도 서지 않고, 어느 한편을 들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곽 목사는 “제 부덕의 소치”라며 오히려 자신을 겸손한 마음으로 다스려가는 것을 보고 감동했다.
곽 목사가 하늘나라로 간 지난 1년 전, 복음병원 영안실에는 수북이 쌓인 조화와 조문객들이 줄을 이었다. 정승이 죽으면 거지들도 오지 않는 옛말이 있지만, 그렇게 많은 조문객들을 보고 평소에 많이 베풀었던 곽 목사의 삶이 증명되는 듯 했다. 은퇴 이후에도 자주 통화하면서 교단의 이모저모를 이야기하며 필자에게 멘토 역할을 하곤 했다.
과거 역사를 알아야 현재와 미래를 열어가는 지혜를 배울 수 있다. 아름다운 신앙의 선배 이자 큰 어른으로 유산을 남긴 그의 흔적들이 이따금씩 되새겨 진다. 그럴 때 마다 故 곽삼찬 목사가 그립다. 좀 더 가까이 하지 못하고, 식사 한 끼라도 대접 못한 것이 후회된다. 고통과 근심걱정 없는 하늘나라 가서 만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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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곽삼찬 목사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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