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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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저녁이 되면 목회자는 탈진을 경험합니다. 많은 시간 공들여 준비한 말씀을 한번에 쏟아 부은 후에 찾아오는 허탈한 감정인지도, 아니면 채 여물지 못한 말들을 주님의 이름을 빌어 쏟아낸 후에 찾아오는 정직한 가책인지도 모릅니다. 그 허탈과 가책의 시간이 이제는 제법 되어 무디어질 때도 되었건만, 오히려 그 석연치 않은 감정은 잿빛 만성으로 굳어져가는 느낌입니다. 새벽 예배를 마친 어느 날 동백섬을 따라 걷다가 문득 셈을 해보았습니다. “1년이 52주이니까, 주일 설교 52번, 찬양예배 52번, 수요예배 52번, 심야기도회 52번, 새벽기도회 350번 정도, 그러면 1년에 설교를 몇 번 하는 거지? 그리고 목회를 16년 했으니까 모두 합치면?” 소스라친 느낌이었습니다. 아무리 설교가 내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라지만, 그렇다고 모세처럼 시내산 정상에 올라가 실시간으로 받아 적은 말씀이 아닌 바에야 그 설교에 목회자 개인의 신앙적 혹은 신학적 소견이 배제될 리 만무합니다.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렇게 많은 설교를 쏟아냈을까? 또 앞으로 얼마나 많은 설교를 해내야 할까?” 얕고 지저분한 우물과 그 바닥에 흙먼지 앙금처럼 가라앉은 참상이 흔들리는 필름처럼 지나갔습니다.
 
4세기의 에바그리우스(Evagrios)는 말했습니다. “수도자는 모든 것에서 떠난 사람이며 동시에 모든 것과 일치를 이루는 사람이다.” 물론 세속에 가장 가까이 다가서 있으며, 교우들과 부대껴 살아야 하는 목회자로서 수도자들에게나 있을법한 신비(神秘)를 기준 삼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잔인한 일인지 압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따로 수도자를 양산해내지 못하는 개신교(Protestant)의 안타까운 현실에서는 목회자에게서 수도자로서의 삶도 배제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고 보면 “모든 것에서 떠나 있지도 못하고, 그래서 모든 것과 일치를 이루고 있지도 못한 내가" 그동안 그렇게 많은 설교를 쏟아놓고 있었다는 게 얼마나 섬뜩한 일이며, 하나님께 미안한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마음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늘 고요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살았던 헤지카스트(hesychast) 아르세니우스(Arsenius)는 자신의 책 「교부의 생애(Lives of the Father)에서 자신을 침묵의 세계로 들어가 은수자「隱修者(hermit)」가 되게 만들었던 콘스탄티노플 궁전에서의 하나님과 단 한 번의 대화를 소개합니다. “주여,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르세니우스야, 사람들 곁에서 떠나거라. 그러면 구원을 받는다.” 성찰이 담겨있지 않은 잡다하고 분주한 만남들보다, 한적한 골방을 찾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정직한 시선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끈다는 뜻으로 여겨집니다.
 
해 기운 교회당에 우두커니 앉아있다 보면, 지난하게 반복되어온 묵은 고민도 덩달아 깊어집니다. 모든 것에서 떠나 있지 못한 까닭에 모든 것과 일치를 이루고 있지도 못한, 즉 잡다하고 지루한 집착이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를 이루지 못하게 하며 그런 가운데 주일이 다가오면 매번 조급해하고, 허겁지겁 성경을 넘기며, 어설프게 파악한 몇몇 구절을 조합해 건조한 설교를 만들어내는 삶에 이제는 스스로 연민(憐憫)을 느낍니다. 잠시라도 떠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안에 독방을 만들어두어야 한다고 했으니, 고독이 지배하는 곳, 그래서 하나님만이 바라보이는 곳을 찾아 깊은 침묵에 잠겨보려 합니다.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서 흘러나와 성령을 통하여 내 마음을 적시는 말씀으로서만 저와 교우들은 하나님과 일치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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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문목사] 나에게 연민을 느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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