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6(화)
 
김운성 목사.jpg
 
잠언은 지혜의 책입니다. 지혜가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잠언에서 지혜는 여성형으로 묘사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8장 2절의 <그가 길의 높은 곳과 네거리에 서며>라고 할 때의 <그>는 사실은 여성형입니다. 지혜를 여성형으로 묘사하는 이유는 사람들을 꼬여 멸망하게 하는 음녀와 대립시키기 위해서라고 생각됩니다.
본문은 지혜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미련한 여인>을 등장시킵니다. 미련한 사람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시끄럽게 나대는 것>입니다. 13절은 <미련한 여인이 떠들며>라고 했고, 14-15절을 보면 <자기 집 문에 앉으며 성읍 높은 곳에 있는 자리에 앉아서 자기 길을 바로 가는 행인들을 불러 이르되>라고 했습니다. 미련한 여인은 사람들 앞에서 떠듭니다. 대문 앞에, 그리고 고대에 사람들이 모이던 장소였던 성읍 높은 곳에 앉아서 <자기 길을 바로 가는 행인들>을 부릅니다. 간혹 이런 부름에 솔깃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미련한 여인은 그들에게 17절의 말씀처럼 <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고 부정한 이익과 쾌락을 속삭입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떠드는 모습, 결말도 모르면서 힘을 주는 모습은 왠지 낯설지 않습니다. 총선이 다가오면서 정치판에는 이런 이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정당을 기웃거리는 이들 중에는 전과자, 심지어 파렴치범들도 있다고 합니다.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들 앞에서 목소리를 높입니다. 이런 모습은 정치판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교계에도 많고, 교회에도 많습니다.
정작 지혜로운 사람들은 조용히 있습니다. 이런 이들은 말하기 전에 깊이 생각합니다. 말을 해도 좋을지에 대해 숙고합니다. 자신의 말이 사람들에게 유익할지를 고민합니다. 이들은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공동체의 선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런 이들로부터 나오는 무르익은 말들은 미련한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에 묻힙니다. 그래서 세상은 시끄럽고 옳은 것을 찾기는 점점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미련한 사람들은 왜 이처럼 나서길 좋아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13절에서도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라고 했습니다. 더구나 18절에서는 <오직 그 어리석은 자는 죽은 자들이 거기 있는 것과 그의 객들이 스올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자신감에 넘쳐 나대는 모습은 요한계시록 3장의 라오디게아교회의 교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7절을 보면 그들은 자신들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주님께서는 그들의 실상이 비참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라오디게아는 면직과 모직 산업이 발전하여, 주후 60년경의 지진 때도 자력으로 복구했을 정도로 부유했는데, 주님께서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다고 하셨습니다. 또 라오디게아는 안약 연고가 유명했는데, 주님께서는 눈이 멀었다고 하셨습니다. 더구나 옷감 산업이 발전했으니 좋은 옷들을 입었을 텐데, 주님께서는 벌거벗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현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3장 15절을 보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진면목을 알지 못했으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나대고 떠드는 이들로 인해 온통 시끄럽습니다. 이럴 때 주님 앞에 조용히 머물길 원합니다. 다 아시는 주님 앞에 알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내놓길 원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듣길 원합니다. 그리고 말을 하려거든 모든 것을 걸 각오를 가지고 말하길 원합니다. 더 깊고, 더 간절하고, 더 진실한 사람들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되길 소망합니다.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성서연구] 알지 못하는 이들의 축제를 바라보며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