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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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발전은 현재에 대한 불만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현재가 주는 고통과 불편함에 대한 불만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게 만들고, 그 결과로 새로운 발견이나 발전이 이루어지고, 그로 인해 인류는 발전해 왔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과도 상통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그 안에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를 불만의 대상으로만 여기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현재는 불만의 대상이기만 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반대로 현재는 감사의 대상이요, 즐거움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이런 면에서 <소망>이란 단어가 가진 맹점도 동일합니다. 소망은 좋은 단어로서 낙망하지 않고 내일을 바라보게 만듭니다. 그런데 소망이란 단어에는 현재가 불만족하기 때문에 내일을 바라보게 만드는 의미가 담겨 있다 보니, 소망이란 단어만 붙들고 산다면 자칫 오늘을 상실할 위험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언제나 오늘은 불평의 대상으로 전락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현재와 미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마음가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현재에 감사하면서 축복의 미래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시므온>이란 인물이 등장합니다. 시므온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무렵 예루살렘에 거주했던 경건한 노인입니다. 본문은 그에 대해 <의롭고 경건하여>라고 소개합니다. 시므온은 타락한 당시 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어두운 세상에서 등불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그렇게 살길 원하십니다. 어느 사회에나 그 숫자가 적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향해 진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홍수 심판 당시의 노아, 아합과 이세벨 시대의 엘리야 선지자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칠천 명의 사람들, 세례 요한의 부모였던 사가랴와 엘리사벳, 그리고 본문에서 만나는 시므온과 그 뒤를 따라 기록된 안나 여선지자가 같은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어둡다 하여도, 거기 함몰되지 말고, 믿음으로 등불을 밝혀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시므온의 현재는 어떠했습니까? 당시 유대는 로마의 식민지로서 황제와 분봉왕, 총독에게 착취를 당했고, 제사장, 서기관, 백성의 장로들 등의 유대 지도자들은 권력에 야합하여 백성을 힘들게 했으면, 종교적 권위 또한 형식화되고 권력화되어 백성들 위에 군림하였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은 유리방황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므온은 어서 속히 하나님의 메시아께서 오셔서 유대 백성을 위로하시길 사모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림>이었습니다. 그의 고통스런 현재는 축복의 미래를 사모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현재가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본문 25절에서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는 그의 현재에 이미 함께 계셨습니다. 시므온의 현재는 불만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성령님과 함께 하는 감사의 대상이었습니다. 또 그 다음 26절에 보면 성령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계시도 주셨고, 27절에서는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라고 했는데, 그 날 시므온은 탄생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고통스런 현재는 동시에 성령님과 함께 하는 은혜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2020년이 시작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사회와 교회, 국제정세 등 여러 면에서 암울한 2020년입니다. 우리는 축복의 미래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암울한 이 현실에도 이미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불평한 하지 말고, 성령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누리면서 하나님께서 주실 위로의 미래, 축복의 미래를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올 한해를 그러한 마음으로 살길 원합니다. 충분한 기쁨과 감사, 동시에 축복의 미래를 향한 간절한 기도가 동시에 우리를 채우길 원합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주님의 평강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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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감사의 현재, 축복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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