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약산(若山)이 약산(龠散)되었다고 마구 짓밟지 마라!
약산 김원봉 의열단단장에 대한 논란이 많다. 약산의 처조카 이었기에 관심을 가지고 보면 한두 가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 글깨나 쓴다는 논객들이요 교수들이다. 정치인들도 몇 마디씩 한 것을 보면 그저 한숨만 나온다. 그래도 독립운동사에서는 산(若山)이 되어 한 산맥을 이루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약산(龠:피리 약,散:쓸모없는 산) 즉“쓸모없는 피리”가 되었다고 내동댕이치고 발로 짓밟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다.
먼저 역사를 바로알고 평가하자! 겉으로 나타난 어떤 사실 하나만 가지고 단순하게 말하지 말고, 그 당시의 역사적인 정황을 알고 평가하자는 것이다. 하나의 예술작품도 진지하게 분석하면서 평가하는데 한 인물을 가볍게 단정 지어버리는 우를 범하지 말자.
약산을 심지어“6.25의 원흉”,“6.25남침에서 핵심역할을 했던”,“6.25전쟁의 1등공신으로 훈장”, 모 당 대변인은”북한정권수립의 공훈자 한국전쟁 중 대한민국 국군을 많이 죽인댓가로 김일성 훈장을 받은“, 그 당 대표는 독립군을 괴롭힌 간도특성대 출신 모 장군을 찾아가 약산을“6.25남침의 주범가운데 한 명”, 모 신문사설에는“6.25남침에도 공을 쌓았다고 훈장까지 받았다”고 단정하였다. 거기다 댓글 쓴 것을 보면 더 가관이다. 장단을 맞추어 춤을 추며 풍악을 울리는 소리가 듣길 정도이다.
그러면 약산이 흔히 말하는 6.25전쟁의 주범이고 원흉인가?
김일성이 빨치산 동료들을 감시 보고하는 프락치 역할로 소련군부의 신임을 얻어 1945년 9월초에 소련 극동전선군 제88독립보병여단의 애송이 대위가 스탈린에게 북한 지도자로 발탁되었다. 그 여단은 만주 빨치산 출신 조선인들이다. 이들이 조국을 떠난 지 오래되어 해방후에 귀국하면서 국내에 기반이 없으므로 소련군에 업혀 귀국한다. 나중에 김일성이 북한 실세가 될 때 북한의 핵심세력으로 발판을 구축한다.“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비록下.중앙일보.1993.”에 김일성이“빨치산그룹을 중심으로 소련파가 당과 군대를 장악케 하고 연안파에 내각의 요직을 맡기며 ~ 자신의 수족인 빨치산파와 소련파로 하여금 당과 군대를 장악케 한 것은 사회주의 국가에선 정부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당이며 그 다음이 군대이기 때문이다”라 밝혀주고 있다. 약산은 1948년 4월에 남북협상으로 늦게 북으로 갔다. 9월에 북한내각구성에 보면 군이나 당 실권에서 밀려나 명목상 한직인 “국가검열상”이 되었다.
김일성은 군의 실권은 빨치산출신 인민집단군총사령관인 최용건에게“민족보위상”을 맡긴다. 그리고 군의 핵심자리에는 유성철에게 인민군 작정국장을 맡겼다. 소련이 북한을 통치하려니 김일성도 못 믿어 소련에 있는 지식이 있는 고려인 200여 명을 5차에 걸쳐 북한으로 데려온다. 이들을 소련파라 한다. 북한의 권력은 빨치산을 거친 제88여단 출신과 소련파가 핵심요직을 장악한 실세들이 된다.
이제 김일성은 자기세력중심으로 권력구조를 구축해놓고 눈을 남한으로 돌린다. 그리하여 1950년 3월 30일 ~ 4월 25일까지 박헌영과 같이 스탈린을 찾아가 남침허가를 받고, 5월에는 중국으로가 마오쩌둥을 만나 우리는 2~3주안에 남한점령을 끝낼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 후 소련 군사고문단은 남침작전 계획을 인민군 총참모장 강건에게 넘겨 1950년 6월 25일에 남침을 개시하여 한반도에는 비극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약산은 북한에서 그의 세력이 없다. 조선의용대 출신들은 해방 후에 거의 다 흩어졌고, 한글학자인 정치력이 없는 김두봉의 연안파와 협력하지만 그 핵심세력에는 밀린다. 나중에 인민공화당으로 독자세력을 구축한다. 그러나 김일성 세력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끝까지 “조선로동당(공산당)”에는 가입하지 않는다. 이러한 북한의 정치판도에서 약산이“전쟁의 원흉”이 되고 전쟁에 참가하여“국군을 많이 죽일 수 있는”위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1952년 3월 19일에 공훈을 받은 것은“국가훈장 1급 최고훈장”이 아닌 1951년 조선인민공화국 군사위원회평북도 전권대표로 있을 때 평북지역 보리파종실적이 우수하다고 인민회의상임위원장 김두봉이 준“로력훈장”이다. 전쟁도 끝나지 안했는데“전쟁공로훈장”을 받았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에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전쟁 후에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3일 만에 끝낸다고 호언장담했던 전쟁이 실패하게 되자“시베리아의 유형을 면치 못하리라고 자포자기하고 있었다고”임은(북조선창설주역.김일성왕조著)은 말해주고 있다. 그는 전쟁실패로 군 장성 70여명이 숙청을 당했는데 전쟁공훈자는 최현이라고 한다. 최현은 빨치산출신으로 한글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무학자이다. 그는 전쟁 후에는 승승장구하여 인민무력부장까지 지냈다. 북한에서 군의 모든 실권은 빨치산출신들이 장악했는데 약산이“6.25의 원흉”이고“6.25전쟁의 1등 공신으로 훈장”을 받았다는 것은 그 당시 북한 정황을 전혀 모르고 하는 말이다.
전쟁이 나면 남한에 잔존한 남로당 20만이 대환영 할 것이라 장담했던 박헌영의 말이 공수포가 되어버리자 김일성은 전쟁실패의 책임을 뒤집어 씌어 평양에 있는“미제간첩”으로 죄목을 붙여 처형했다. 약산도 신변의 위협을 느껴 탈북(?)하려다 발각되어 역시 중국 장제스의“간첩”이라는 죄명으로 숙청되어 가족 모두 사라졌다. 약산의 죽음은 아무도 모른다.
20대 초반부터 조국해방독립을 위해 활동한 약산(若山)이다. 한때는 서슬이 푸른 일제경찰도 약산을 수배하기 위해 최고의 현상금을 걸고 수십 년간 뒤쫓았으나“산 같이”흔들림 없는 약산(若山)이었다. 오히려 우리 동포가 약산을“쓸모없는 피리”같은 약산(龠散)으로 만들어 버렸다.
금년은 약산을 중심으로 조직된“의열단”창단 10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쓸모없는 피리가 된“약산(龠散)”을 다시“약산(若山)”의 자리로 세워볼 수 없을까?
이번기회에 산산조각으로 갈라진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하나로 묶어, 지난날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 바쳐 희생한 선열들의 유지(遺志)를 이 땅에 이루어나가도록 다 함께 힘써보자!
지금은 기독교의 성령강림절기이다. 바울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라"(엡4:3)라 말씀하셨다. 이번 절기에 우리 민족의 분열된 생각과 마음을 하나 되게 해달라고 간구하자!
 
 
박의영.jpg▲ 박의영 목사(전 경성대학교 교목. 박문희 박차정 의사 유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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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약산이 6,25의 원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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