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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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크리스마스행사를 처음 했을 때는 언제였을까? 1891년 9월에는 북장로교의 베어드가, 10월에는 호주선교사 제2진 5명이 내부하게 되는데 이들이 부산에 온 이후 성탄절을 지키고 성탄절 날에는 선교사들이 모여 성탄 파티를 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한국인과 같이 성탄행사를 거행한 첫 기록은 1900년 12월 25일자의 왕길지 선교사의 기록이다.  
왕길지는 1900년 10월 29일 부산에 도착하여 11월 4일 첫 주일을 맞았다. 이때는 부산진교회가 설립된 지 8년이 지난 때였다. 이날 예배에는 15명의 남자, 48명의 여자, 곧 63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그런데 예배처소로 사용되던 여선교사의 주택이 협소했다. 그래서 그해 12월 초 좌천동 여선교관 근처의 한옥을 매입했고, 이곳을 대강 수리하여 12월 9일부터 예배드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당시 관례와는 달리 처음부터 남녀 간의 좌석을 구분하거나 분리벽을 설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곳에서 모인 12월 16일 주일에는 50명이 23일 주일에는 64명이 출석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모인 성탄절 예배에는 성인 60명, 아동 57명이 참석하여 예배 공간이 매우 협소했고, 남자들은 여성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바깥에 앉아 예배드렸다고 한다. 이 때가 왕길지 선교사가 한국에서 맞는 첫 성탄절이었다. 그는 12월 25일(화요일)자 일기에서 이렇게 썼다. 
“오늘은 무척 즐거운 날이었다. 아침에는 많은 선물에 특히 우리 아이들이 감격해 했다. 선교관은 (한국과 영국의) 국기와 중국식 등불, 초록 잎들로 장식되었다. 아침 일찍 날씨가 어떤지 보려고 나갔더니, 놀랍게도 우리의 한국식 교회 건물 위에 태극기 두 개가 나부끼고 있었고, 선교관 앞뜰에는 막대에 달린 초롱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그것을 보고 우리 교인들이 자기들만의 건물을 갖게 된 것을 얼마나 기뻐하는지 새삼 느꼈다. 예배 시간은 열 시 반이었다. 그 날 아침에 모인 성도들을 다 수용하기에는 교회 크기가 아직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날씨가 매우 따뜻하여 거의 여름 날씨 같아 감사했다. 덕분에 문을 다 열고 사람들을 마루에도 앉힐 수 있었다. 여자 아이들과 젊은 여성들은 다 교회 안에 앉고, 바깥쪽에는 ‘덜 좋게 보이는’(less good looking) 여자들과 남자 아이들이 앉았다. 여자들의 자리가 그렇게 배치된 것은 우연히 된 일이다. 바깥쪽에 앉은 여자들은 대부분 늦게 온 교인들이었다. 그래서 안쪽에 앉은 남자들에게 시간에 맞춰 왔지만 예배 중에 바깥으로 자리를 좀 옮겨달라고 요청했다. 이렇게 한 것은 호주의 아이들(Record 라는 잡지 독자들)에게 사진을 통해 한국인들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몇몇 아이들과 젊은 여성들은 빨강, 파랑, 초록, 자홍색 비단옷으로 매우 아름답게 장식된 옷을 입었고, 심지어 청년들 중 몇 명은 긴 자홍색 비단 두루마기를 입고 왔다. 연로한 어른들 다수는, 크게 가난한 경우를 제외하면, 다 흰 비단옷을 입고 왔다. 모두가 가장 멋진 정장과 드레스를 입고 예배에 참석했다. 그 모습은 장관이기도 했지만, 또한 우리 교인들이 성탄절을 “그리스도의 탄신일”이라고 부르며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예배는 짧고 멋지고 긴장감이 있었다. 아이들 덕분에 회중의 찬송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는데, 어른들은 비록 모르는 성탄 찬송이었지만 그래도 여러 곡을 함께 불렀고, 남녀 아이들이 다 즐거워했다. 한 곡은 소년과 소녀의 번갈아 부르는 노래였는데, 소년들과 소녀들이 각자의 파트를 불렀다. 예배 후, 주일학교에 개근한 아이들에 대한 예배 시상이 있었다. 큰 아이들은 최근에 번역된 한글 신약전서를 받았다. 우리 돈 원가로는 1실링에 불과한 책이지만, 한국 사람들은 지금 너무 가난해서 그들에게는 이 성경이 호주에서 열 배나 비싼 책과 맞먹는 가치가 있다. 어린 아이들은 석판과 색종이로 감싼 석필을 받고 매우 기뻐했다. 그 후 선교사 부인들이 교인들 각 사람에게 땅콩, 일본 사탕, 일본 과자 두 개, 오렌지 한 개가 든 종이 봉지 모양의 선물을 나누어 주었다. 출석한 사람 모두가 그런 선물 봉지를 하나씩 받았고, 몇몇 사람에게 오후에 몸이 약하거나 아파서 오지 못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선물봉지를 들려 보냈다. 분배된 종이 봉지는 전부 160개였다. 모임 시작 때 계수한 인원은 여자 아이가 30명, 남자 아이가 27명, 여자가 48명, 남자가 12명이었는데, 그런 차이가 난 것은 어머니나 큰 누나가 데리고 온 어린 아이들이 계수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녁이 되자 선교관 앞과 교회 앞마당에 등불을 밝혔다. 남자 아이들이 마당에 모여 교사들과 장년들 몇 사람의 지도에 따라 등불 아래서 여러 가지 게임을 즐겼다. 그 등불이 교인들에게 기독교인의 명절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었다. 오늘은 우리가 매우 잘 어울렸던 날, 교인들 각자가 행복하고 다른 이들에게도 행복을 보여준 날이다. 과연 저 옛날 베들레헴 들판에서 선포되었던 천사들의 노래가 여기서도 성취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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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 부산에서의 첫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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