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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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도에 출간된 ‘엘버트 놀런’의 저서 <오늘의 예수>가 있다. 이 책을 짧게 요약하면 1부에서는 시대의 징표를 요약한 후 오늘의 의미를 정립한다. 2부는 예수님의 고유한 영성에 대하여, 그리고 3부는 예수님의 영성에 맞추어서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조명하고 있다. 인격의 변화를 통한 하나 됨의 신비를 구체적인 개념으로 삶의 현실에서 밝히는 부분이다. 바로 하나님과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우주와 하나 됨의 신비를 삶을 통해 이룰 때 인간은 진정한 근원적인 자유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이 강조하는 근본은 예수님의 관점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이 이와 같은 근원적 자유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스스로 먼저 사람을 사랑하셨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으셨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버리셨다. 이 정신이 바로 기독교정신이다.
그런데 인간은 본성적으로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타락해 간다. 그것의 근원이 ego, 바로 자아(自我)이다. 여기는 우리가 주목할 교훈이 있는데 인간생활에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에고이즘(egoism)’이라는 것이다. 곧 이기주의,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말한다. 이것은 자기 자신 말고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필요와 자신의 만족만을 갈구하며 인간에 대한 연민이나 공감도 완전히 결여된다. 타인에게 극도로 잔인할 수 있고 타인을 고통에 빠뜨리는 악함을 나타낸다. 그러나 자신이 하는 모든 것은 정의(正義)라고 착각한다. 이런 에고는 집단 이기주의와 지배 구조 형태를 취하기도 한다.
권력을 갈망하는 것은 무력을 써서라도 세계를 지배하려는 에고의 시도이다. 그것은 돈에 대하여 만족할 줄 모르는 소유욕을 드러내며 제도나 조직들은 목적을 달성하려는 수단일 뿐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근원적인 자유함이 없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신 분이 예수님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 사랑은 비교원리가 아니라 창조원리에서 해석되는 것이다. 즉 있고 없고, 많고 적고, 높고 낮음의 관계를 넘어 서로를 돌보아 주고 공감하며, 서로를 보호해주는 것, 서로 가진 것을 나누는 관계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이것이다. 이것을 이루기 위하여 스스로 낮아지고 가난하게 되셨으며 섬기고 죽기까지 하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고 이와 같이 사심으로 하나님과 하나 됨의 신비를 보여주셨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 하나 됨의 신비로 근원적인 자유함을 누리게 하셨다. 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한 가지 분명하게 마음에 담아 두어야 할 것 있다. 그것은 너를 자유하게 하고 너를 기쁘게 하고 너를 행복하게 하려면 내가 아프고 내가 힘들며 내가 고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너를 아프게 하고 너를 힘들게 하고 너를 불행하게 하면서 내가 행복하고 내가 자유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다. 그 삶은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이다. 사단의 지배를 받는 삶이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언제부터인가 나의 기쁨을 위하여, 나의 행복을 위하여 너를 아프게 하고 너를 힘들게 하면서 자기는 정의라고 부르짖는 타락한 삶이 퍼져가는 것을 목도하는 아픔이 있다. 그것은 성탄 이전의 인간의 삶이다. 성탄 이후의 삶은 결단코 그런 삶이 아니다. 성도라면 오늘의 예수님을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인생의 겨울도 깊어간다. 이즈음 성도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에서 세 가지 비유로 말씀하셨다. 첫째는 열 처녀 비유이며, 둘째는 달란트 비유, 그리고 셋째는 양과 염소의 비유다. 이 내용은 삶의 방식의 내용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일깨우는 메시지다.
그 핵심이 ‘작은 자’에 대한 관심이며 그 작은 자는 ‘지금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다. 누가복음 10장과 마태복음 25장에서는 그 작은 자가 곧 예수님이라는 것을 교훈한다. 그 작은 자가 곧 오늘의 예수님이며, 그 작은 자를 사랑하는 자가 곧 오늘의 예수다. 이 관계개념의 핵심은 사랑이다. 그럼에도 현대 그리스도인의 삶의 관점은 어제의 예수님에 대하여 집중되어 있고 오늘의 예수님에 대하여는 관심이 별로 없다는 것이 문제다. 물론 원론적인 면으로는 어제의 예수님이 우리 신앙의 중심이다. 그리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중심은 오늘의 예수님이 되어야 한다.
주님의 말씀은 한결같다. “사랑하라”는 것이다. 나머지는 다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하늘 보좌를 내려놓고 땅으로 오셨고, 고난 받으셨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우리 위하여 부활하셨다. 그리고 마지막 영원한 그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하여 다시 오시는 주님이다. 이 모든 중심의 메시지가 무엇인가? ‘사랑’이다. 이 사랑의 구체적 행동이 바로 성탄이다. 성탄의 구체적인 의미에 대해서 주님은 마가복음 10:45절과 마태복음 25:35~36절을 통해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 내용을 다시 한 마디로 표현하면 오늘 우리의 일상생활을 통해 “사랑하라.”는 것이다. 누구를 사랑하라는 것인가? 작은 자, 곧 지금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들이 누구인가? 오늘의 예수님이라는 말씀이다. 그것이 성탄의 진정한 의미이며 축하이다.
당연히 예배는 중요하다. 전도해야 하고 여러 가지 교회 일들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일들의 중심이 무엇인가?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나누고 행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하여 교회당이 있고 성도가 있는 것이다. 교회의 사명과 사랑은 함께 동행하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의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거리마다 성탄축하 케롤송은 울려퍼지고 교회마다 성탄축하 행사는 요란하다. 그런데 지금도 거리에는 굶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아파하는 사람들, 작은 자들이 우리의 무관심의 대상으로 떨고 있다. 교회에서 원망과 불평, 비판과 정죄의 철연장소리가 멈추지 않는다면 그것이 성탄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이 성탄의 계절에 우리의 심령에, 나의 심령에 예수님이 계신가? 오늘 예수님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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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칼럼] 성탄, 그리고 오늘의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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