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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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난 선배 목사님이 뜬금없는 질문을 하셨다. “서목사, 은퇴목사 주제가 아시는가?” 웃으면서 모른다고 대답하는 나를 바라보시며 어르신은 노래 한 곡을 부르셨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교인 없고.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네. 교인은 어디 가고 나 홀로 앉아서 이 일 저 일 생각하니 눈물만 흐른다” 현제명 선생님의 <고향생각>의 개사(改詞)였다. 무릎을 치며 박장대소하는 나와는 달리 어르신의 눈은 젖어 있었다. 말없이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시던 어르신의 한 마디는 내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서목사는 아직 은퇴의 외로움을 몰라서 그런 거야.” 나는 어르신의 손을 잡고 조용히 데살로니가전서 5:16~18절과 하박국 3:17~18절, 그리고 다니엘 3:17~18절을 들려 드리면서 속으로 읊조렸다. ‘그 누구보다 은퇴목사의 아픔과 외로움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르신은 허허로운 눈으로 그냥 하늘만 올려다보셨다.
은혜 받은 자는 반드시 그 감사함을 표현하게 되어 있다. 그 삶의 아름다운 내용을 주님은 ‘천국이 우리 안에 있다’고 깨우치셨다(눅17:21). 누가복음 18장 바리새인과 세리의 이야기를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그려 놓으셨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특히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한번쯤 바리새인의 삶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바리새인은 당시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었다. 토색하지 않았다. ‘토색’의‘하르팍스(aJJrpax)’는 ‘탈취하다’, ‘늑탈하다’라는 뜻인데 그렇게 살지 않았다는 것이다. 불의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불의’의 ‘아디키아(ajdikiva)’는 죄의 총칭이며 ‘죄’의 ‘하마르티아(aJmartiva)’는 ‘과녘을 벗어나다’라는 뜻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생각과 마음과 행위’를 뜻한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그렇게 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간음하지 않는, 도덕적으로도 완벽한 사람이었다. 요즈음처럼 성도덕과 윤리가 파괴된 시대에서 바라보는 바리새인은 그야말로 얼마나 성결하고 거룩한 신앙생활을 한 사람인가를 생각하며 새삼 존경스러운 마음이다. 일주일에 두 번을 금식했다. 십일조도 철저하게 드리는 사람이었다. 그의 신앙생활은 최고의 수준에 이른 완벽할 정도의 생활이었다. 그런데 왜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에 닿지 않았을까? 누가복음 18:11절에는 치명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따로 서서’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자리가 낮아지지 않는 개인주의이다. ‘나는’ 자기를 높이는 자기주의이며, ‘다른 사람들’은 행위로써 자기 의를 자랑하는 것이다. ‘같지 아니하고’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비교원리이며, ‘이 세리와도’는 차별화의 교만이다. 하나님이 몹시도 싫어하시는 내용으로 하나님 앞에 선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 죄의 표현으로 결정타를 날린다. “그래서 감사 하나이다”
세리는 어떤 사람인가?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내가 지은 죄가 얼마나 많은 지 유구무언입니다.” 라는 말이다. 보다 구체적인 개념으로 표현하면 “바리새인처럼 금식생활도 제대로 못했고, 온갖 죄를 지었습니다. 좋은 자리에서 백성들로부터 토색을 했고, 도덕적으로도 깨끗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십일조도 제대로 드리지 못했으니 의로운 것이라고는 없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이다.
이제 이들을 향한 주님의 판결문을 보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잠깐 눈을 감고 묵상해 보면 충격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다. 바리새인을 통하여 오늘 내 모습,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지 않는가? 바리새인은 무서울 정도로 자기 자신의 의로 가득 차있다. 그러나 세리에게서 듣는 자신의 모습이란 죄인이라는 것과 철저하게 주님의 사하심과 용서의 은혜가 절실한 것이다.
오늘도 교회 안에는 바리새인과 세리인 두 부류의 교인들이 어우러져 있다. 바리새인처럼 나를 좀 알아달라는 사람, ‘내가 이렇게 했지 않느냐? 내가 이토록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느냐? 내가 하는 것이 다 맞고 옳다. 그러니까 하나님도 나를 좀 알아주시고, 다른 모든 사람들도 나를 좀 알아 달라’는 사람이 있다. 그것이 뜻대로 안되면 성질을 부리고 튀는 언행을 하면서 문제를 만들어 시끄럽게 한다. 무서울 정도로 자기를 드러내는 사람, 그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항상 문제는 ‘내가’라는 존재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세리에게서 배우는 것이 무엇인가? 너와의 관계를 조명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사하심과 은혜의 도우심을 갈구하는 것이다.
교회 생활을 하다가 누가 나를 향해 조금만 이상한 말을 해도, 조금만 자존심이 상해도 참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리며 주님의 말씀을 짓밟고 밀쳐버리는 모습을 본다. 교회야 망가지든 부서지든 상관없는 언행을 하는 경우를 이제는 흔히 볼 수 있다. 과연 주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성도의 모습인가?
우리는 세리의 기도를 통해 많은 교훈을 받는다. 성전에서 세리의 마음은 오직 하나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이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무엇을 감사하는가? 남달리 복 받은 것, 다른 사람과 다른 것, 그래서 그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며 감사하는가? 그것은 바리새인의 감사이다. 인간의 행동에는 항상 ‘무엇 때문에’라는 이유가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그 이유는 오직 하나, ‘주님 때문’이어야 한다. 그것이 세리의 감사이다. 그것이 하박국의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이다. 내 뜻대로 안 되었을 때도 원망과 불평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감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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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칼럼] 무엇을 감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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