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서임중목사 copy.jpg
서임중목사 copy.jpg
 
 인간에게는 지성(知性)이 있다. ‘지성’을 심리학에서 정의할 때 ‘감정과 의지에 상대하여 감각, 지각, 직관, 오성(悟性) 등의 지적 작용을 말하는 능력의 총칭’이라고 한다. 또 인간에게는 감성(感性)도 있다. ‘감성’을 심리학에서는 ‘자극 또는 변화에 대하여 감각을 일으키는 것’이라 한다.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는 영성(靈性)도 있다. 이는 신령한 성품의 영적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영성이 중요하다. 지성은 지식의 습득으로 인한 노력에서 가능하며 감성은 도덕적 수준에서 다듬어 질 수 있다. 그러나 영성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주셔야 충만한 것이 영성이다. 기독교인의 삶이란 말할 것도 없이 이 영성의 충만함으로 풍성한 믿음 생활을 할 수 있다. 영성이 없으면 믿음 생활은 자연스럽게 죽어갈 수밖에 없다.
영성이 무엇인가? 바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말은 영성이 깊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요즈음 부쩍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서 영성이 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어디서 비롯되는 느낌일까? 말하는 것이 덕스럽지 못하고 은혜롭지 못하다. 생각하는 것이 건강하지 못하며 부정적이다. 행동에 그리스도인의 향기가 없다. 서로의 관계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생활에서 의심하는 마음이 깊고 신뢰함이 없다. 특히 교회생활에서도 상호 관계에 있어 불신의 표현이 많아지고 그래서 믿어주는 미덕이 몹시 약화되어 있음을 본다.
심리학의 가르침에 ‘자기 생각과 마음과 생활이 불성실 하면 타인의 모든 생활이 불성실하게 느껴지고, 자신이 도적질을 잘하면 타인의 모든 행위가 도적질 같이 느껴지며, 자신이 거짓말을 잘하면 타인의 모든 말들이 모두 거짓말로 느껴진다’고 한다. 그래서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주석(酒席)에서 주고받은 대화 가운데 무학대사의 “전하, 오로지 사물은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보는 사람의 마음이 돼지 같은 마음이면 상대가 돼지로 보이고, 부처와 같은 마음으로 상대를 보면 부처로 보이는 것입니다.”라는 말이 우리 일상에서 회자된다. 그렇다!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나고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는 법이다.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 간에도 신뢰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의심하며 색안경을 끼고 보는 희한한 일이 흔히 일어나고 있다. 또한 요즈음 그리스도인들의 말하는 것을 보면 독설이 예사롭게 구사되고 부드러운 언어가 사라지고 있음을 본다. 입만 열면 비판이고 정죄이며 불평이다. 같은 말도 모질고 독하게 하는 나쁜 습관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왜 그럴까? 그것은 영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영성이 사라지면 그것으로 끝이다. 영적 허수아비일 뿐이다.
어떻게 하면 영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 대답은 분명하다.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잃어버린 영성을 회복시켜 준다. 기도가 깊어지면 영성이 회복된다. 영성이 깊어지면 그 표현되어지는 모습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단계로 나아간다. 보다 구체적으론 십자가 은혜를 깨닫게 된다. 죄인 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의 존재 의미를 바로 알게 되는 것이다.
바리새인의 약점이 무엇인가?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보지 못하는 것이다. 더럽고 추하며 오만하다. 죄인이면서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약점이다. 세리의 강점은 무엇인가?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보았다는 것이다. 자신의 나약함과 허물을 보았으며 아무 것도 내 세울 것이 없는 자신의 그 모든 것을 발견함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죄인이라고 밖에 고백할 수 없었던 사실이다.
작금에 SNS를 통해 눈살 찌푸려지는 상황을 본다. 분명한 것은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는데 언행은 시정잡배보다 못한 온갖 독기서린 모습이다. 모든 사람을 정죄하며 스스로 하나님이라도 된 듯이 하는 모습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자기 자신의 눈 속 들보를 먼저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눈에 들보를 보기는커녕 오히려 남의 눈에 티를 빼려고 온갖 추태를 부리며 복음전도의 길을 가로막는 장면을 연출한다. 그래서 빈대를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태우는 일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대부분 교회에서 지도자들이 범하는 죄가 오만과 독선이라는 것이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비난인데 스스로는 건강한 비판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상대방을 몰아붙인다. 독선을 뱉으면서도 스스로는 소신이라 말하며 교회를 이끌어가려는 것보다 무서운 죄는 없다. 자신은 오만과 독선을 일삼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오만과 독선을 경고하는 죄, 그것이 바로 바리새인이 저질렀던 죄였다. 그것은 영성이 죽을 때 일어나는 필연적인 과정이다. 그 과정으로 인해 한국교회는 갖가지 시련과 아픔에 몸살을 앓고 있다.
영성이 회복되면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십자가 은혜를 깨닫는 것이다. 하늘을 찌르는 오만과 독선으로 가득 찼던 바울이 그랬다. 십자가 은혜를 깨닫고 난 그는 자신이 죄인의 괴수가 됨을 자인하며 겸손해졌다. 그리고 일관된 그의 삶은 이해와 용서와 관용과 사랑이었다. 타인에 대해서는 비판도, 소신도 피력할 수 없는 것이 자신의 모습임을 알았기에 그는 언제나 사랑에 가득 찬 교훈적 가르침으로 많은 교회에 편지를 썼던 것이다. 그 다음으로 표현되어지는 것이 죄 사함의 은총이다. 거기서 표현되어지는 삶의 내용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삶이다. 다른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이것이 영성이 회복된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영이 잠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잠자는 영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영성이 깊어질 때 자아성찰(自我省察)이 되고 視乎冥冥, 聽乎無聲(시호명명 청호무성)이 된다. 거기서 진정한 십자가 은혜를 나의 삶에 담을 수 있다. 그것이 곧 사랑이다. 이 가을 앞에서, 잠자는 영성을 깨우라!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서임중칼럼] 잠자는 영성을 깨우라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