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부산일신여학교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jpg▲ 부산진일신여학교 - 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
 
금년 2018년은 3·1만세운동이 일어 난지 꼭 99년이 되는 해이며, 내년 2019년은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부산의 3·1만세운동 시발점은 부산진교회 교우들에 의해 촉발되었다. 그것은 부산진교회에 다녔던 일신여학교 교사 박시연 선생이 부산 만세운동의 주요한 배후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부산의 첫 시위는 기독교인들로 특히 부산진교회 교인 100여명이 시위를 함으로써 점화되었고 그 후 3월 11일 일신여학교 학생들과 교사 등 50여명이 만세운동에 가담하였다(부산민주운동사, 부산진교회 100년사 참조). 이렇게 시작 된 부산의 3·1만세운동 시위는 부산 구포시장과 경남 거제, 통영, 그리고 황해도를 이어 전국 3위의 만세운동 참여기록을 남기게 된 것이다.
부산에서는 이미 1916년 9월에 있었던 전차사고로 수 천여명의 시민들이 봉기하여 전차를 전복시킴으로서 누적된 일제에 대한 울분의 감정을 분출시킨 바 있다. 부산은 그 당시 전체 인구 중 한국인 62,846명, 외국인 187명, 일본인 28,012명으로 일본의 토지 수탈과 횡포가 부산지역 민족의식을 강하게 자극하는데 밑거름이 됐다.
1919년 3월 2일 독립선언서가 부산지역에 비밀리에 배포가 됐다. 부산에 연고가 있는 서울로 유학 간 학생들이 내려와 부산 상고(현 개성고교)와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 대표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면서 독립운동의 참여를 독려했다.
이 때 일신여학교 이명시(일신여학교 고등과 재학 1922년 3월 10회 졸업생)가 연락책으로 활동했다. 3월1일 새벽, 일신여학교 기숙사 주변을 비롯하여 시내 동구 지역 시장가 주변과 거리로 격문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때 고등과 4학년 김응수가 격문을 주워 들고 주경애 선생에게 보여 주었고 주경애 선생은 부산 상업학교 학생들과 만세에 동참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려 줬다.
3월11일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와서는 김응수, 김순이, 박정수, 김반수, 심순의, 김봉애(전 부산YWCA 회장 역임, 부산 중앙교회 권사), 이명시 등의 학생들이 기숙사로 뛰쳐나와 동구 좌천동 거리를 누비면서 만세 시위를 전개했다. 일본 검찰청 자료에 의하면 당시 일신여학교 교장인 캐나다인 데이비스와 주경애 선생이 주동해서 여러 사람들에게 시위참여를 독려 했으며, 3월 10일 고등과 전 학생을 중심으로 태극기를 제작하도록 하고 시위 당일에는 데이비스 교장과 호킹 선생이 학생들에게 만세를 부르도록 앞장서서 지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부산시사). 이런 연고로 데이비스 교장과 호킹 선생이 경찰서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자 시민들도 이에 합세하여 동참하기 시작했다. 점점 숫자가 불어나더니 수 백·여명이 시위에 합세했다. 시위꾼들을 막기 위해 일본 경찰이 대거 출동하여 진압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 일신 여학생 전원과 여교사 2명이 연행됐다. 일본 경찰들이 시위 주동자가 누구인지를 알아내려 했으나 체포된 여학생들은 구타와 폭행을 당하면서도 일체 발설하지 않았다. 어느 여학생은 발가벗겨 고문을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결국 일본은 검거 학생 11명과 교사 2명 전원을 부산 감옥으로 이송했으며 학생들은 재판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 받았다.
99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는 최근 동구청에서 3‧1만세운동과 일신여학교의 3·1정신을 재현하는 행사가 부산광역시 동구의 주도로 2월 28일(수) 오전 좌천동 소재 일신여학교에서 거리퍼레이드 및 퍼포먼스가 진행된다. 이에 먼저 앞장서지 못한 부산 1800여 교회와 관련 통합 측 교단 노회 그리고 부산 교계를 대표한다는 부기총 관계자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는 것은 기독교계가 해야 할 일을 관이 주도하니 매우 안타깝다.
이밖에도 초량교회에 다녔던 백산 안희제가 설립한 백산상회와의 독립자금 공급전달책이었던 자매여숙 설립자이자 일신여학교 출신 양한나 여사(부산YWCA 회장 역임, 부산진교회)의 역할도 3·1독립운동과 관련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일신여학교를 졸업한 인물 중에 과거 민주당총재를 역임한 박순천 여사도 대표적인 졸업 동문이다. 부산에 이런 기독여학교가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져 지금은 부산시 문화재로 남아 있지만 이곳을 관리하고 이름을 빛나게 해야 할 교계는 잠자고 있으니 한심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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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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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신 여학교와 3·1만세운동 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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