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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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들어야 믿을 수 있고, 믿어야 구원에 이른다.”는 로마서 10:9,10 말씀을 어릴적부터 굳게 붙들었다. 기독교는 〈말씀을 듣는 종교〉 〈진리를 들려주는 기독교〉 라는 복음의 핵심을 붙잡을 수 있도록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다른 길이 없다.」는 확신(요14:6, 행4:12)을 가지고 교회에서는 어린 주일학생들과 청소년들(중, 고등학생)에게 열심히 성경을 가르쳤다.
어머니를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복음을 들으시게〉 하는 일 이었다.(롬10:17)
비교적 큰 농사를 짓고 있는 우리 집안은 논농사와 밭농사를 통하여 생산되는 농산물의 양이 많으므로 농산물을 부산 자갈치에 있는 농협 공판장으로 직접 운송 해 와서 도매로 넘기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이 때문에 부모님은 부산 출입을 하시게 되는데 어머니는 농산물 경매가 완료되고 나면 가까운 영도에 있는 아들의 자취방으로 오셔서 하루나 이틀을 지내다가 가신다. 그런 날이 다행스럽게 주일을 끼게 되면 어머니에게 복음을 들려드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는 것이다.
제3영도교회는 어머니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맨 처음 발을 들여 놓으신 교회가 되었다. 어머니는 짐짓 사양하는듯 하면서도 아들의 간절한 요청을 끝내 뿌리치지 않으시고 그 어려운 발걸음을 교회로 향하셨고 예배시간에는 평생 해 오신 ‘종교 행위(제사)’에 익숙해진 그 마음가짐대로 아주 진지하고 경건하게 예배 순서를 따라서 참예하셨다.
특히 목사님의 설교 말씀에 관심을 많이 보이셨고 성경에 대한 호기심은 매우 크셨다.
1918년 합천군 가회면에서 출생하신 어머니는 매우 보수적인 유교의 풍습 때문에 어릴 때 〈한글〉을 배우지 못하셨다. 외조부께서 “딸이 글을 배워 똑똑해지면 남편에게 순종을 잘 하지 않고 너무 자유롭게 살 수 있으므로 차라리 글을 모르는 것이 낫다”는 소신 때문이었다고 한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거꾸로 판단하신 것이다.
한글 해독에 대한 어머니의 염원이 간절하시므로 기회가 될 때마다 글자를 가르쳐 드렸다. 성경을 사드려 곧장 읽기 공부를 하시도록 도와 드렸는데 기적이 일어났다. 어머니는 매우 빠른 속도로 한글을 깨우치셨는데 완전 ‘자습’이었으며 교과서는 ‘성경’이었다.
틈만 나면 성경을 펼치고서는 소리 내어 읽으시는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말씀의 내용을 이해하시면서 반응을 보이고 감탄하시기를 자주하셨다. 내가 보기로도 신구약 성경을 여러번 완독 해 내셨다. 얼마 후 김해 본가를 맡아 계시던 큰 형님의 2남 3녀가 모두 부산의 학교에서 공부를 하게 되면서 어머니는 다섯 손주를 돌봐주기 위하여 연산동에 정착하시면서 근처의 연희교회(천헌옥 목사 시무)에서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하셨다. 마치 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았다. 담임목사의 전언(傳言)에 의하면 어머니는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삼으셨으며, 자녀들이 보내오는 용돈을 차곡차곡 고이 간직하여 적지 않은 〈건축 헌금〉을 봉헌 하셨다고 한다.
노경의 어머니는 이 땅에서의 육신의 장막 생활을 하루 빨리 끝마치고 어서 속히 천국으로 입성(入城) 하고 싶어 하셨다. 열다섯 살에 우리 가문으로 시집 오셔서 8남매를 낳아 기르시고, 큰 농사를 지어야 하셨고 거기다가 부모를 일찍 여윈 한 마을의 시 조카들까지 보살펴야 하셨다. 마을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우리 김해 김씨 집안의 어른들까지 돌아보시면서..... 그러다 보니 어머니의 육신은 과부하가 걸려 젊은 시절에도 밤이 되면 온 몸이 쑤시고 자주 “60살까지만 살아도 괜찮겠는데.... 8남매 중 절반은 혼인시킬 수 있을 것이고 동생들은 위 형들이 맡을 수 있을 것이므로!” 이렇게 말씀 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면서 건강도 무척 좋아지셔서 꼭 100세를 향수 하시고 지난 2017.10.19.(목) 13:30에 숨을 거두셨다. 병원 신세도 지지 않으시고 “할렐루야 아멘!”을 외치면서 눈을 감으셨다.
사직동교회 설립 50주년(1967.10.8.~2017.10.8.) 주요 행사들을 10.18(수) 집사, 권사 56명 임직식까지 다 끝내고서, 그리고 주일에 지장되지 않도록 10.21(토) 부산에서 사직동교회 주관으로 발인 예배를 드리고 이동하여 너무나 맑고 아름다운 풍요한 가을 날 무척산이 저 건너편으로 바라보이는 고향 김해 선영에서 하관예배를 드렸다.
우리 어머니를 향하신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너무나 크고 감사하여 우리 형제들은 장례비용을 치루고 남은 조의금 전액 2천만원을 고려신학대학원과 고신 세계선교부 KPM에 기쁜 마음으로 기부하였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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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칼럼] 故 한차남 권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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