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차남 권사님은 우리나라의 주권이 간악한 일제에게로 넘어간지 8년 되던해, 그리고 우리나라의 주권을 되찾고 저 온 백성이 궐기하였던 「기미년 3.1운동」이 일어나기 한해 전 1918년 5월 11일 경남 합첩군 가회면에서 태어났다. 합천 가회 땅은 말 그대로 아름다움이 모여 있는 곳으로 지금도 황매산과 모산재를 품고 있는 천하의 절경을 지니고 있는 땅이다. 황매산의 철쭉은 전국 제일이며 모산재는 남한의 <금강산>이라고 불릴 정도로 기암절벽들이 병풍처럼 버티고 서있는데 등산을 해보면 그 위용과 아름다움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그리고 황매산과 모산재 계곡을 타고 흘러내리는 청정수는 그 소리조차 시원함을 느끼게 한다.
한 권사님은 가회에서 어린 시절을 자라다가 부모님의 결단에 의하여 김해로 이사를 왔다. 그리고 15살 나이에 김해김씨 가문으로 시집을 와서 무려 8남매를 낳아 고스란히 양육하였다. 조상대대로 김해 땅을 지키면서 살다보니 문중은 넓었으며 집안의 대소사를 도맡아 치루어야 했다. 특히 우리나라에 오래 그리고 깊이 뿌리내려진 유교의 문화와 풍습은 <조상제사>를 잘 지내는 것이 효도의 으뜸이라고 가르치고 인식돼왔다. 한 해에 거의 스무번 가량 조상제사를 지내야 하는 일은 가문에서 가장 큰 중대사였으며 한 권사님은 큰 가문의 맡 며느리로서 <조상제사>만은 정성껏 성실하게 지내야 한다는 신념으로 심지어 흉년이든 해에도 제사상에 올릴 쌀밥을 위하여 그 희귀한 백미를 어딘가에 꼭꼭 숨겨 저장해두었다.
사남매였던 부군(夫君)의 혈육 중 2남 1여가 어린 자녀들을 두고 일찍 세상을 떠나므로 시집의 그 많은 조카들을 힘이 닿는대로 보살피며 키우기도 하였다.
왜정시대 36년을 거의 온 몸으로 살아내었으며 8.15광복, 6.25의 처참한 전쟁 그리고 보릿고개 시절 그 암울한 세월들을 8남매를 지키면서 끈질기게 살아내었다. 그런데 한 권사님의 인생에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다섯째 아들이 목사(牧師)가 되겠노라고 신학교에 들어간 것이다. 그 아들이 이웃 마을에 있는 교회를 몰래 다니는 것을 눈치로 대충 알고 있었으나 그러다가 이내 그만 두겠지라고 짐짓 모른체하였다. 고등학생이 되면서는 더 노골적으로 아예 보란 듯이 교회를 다니는데 이제는 야단을 치고 타이르기도 해 보았으나 기를 꺾을 수 없었다. 객지에 나가있는 위의 형들을 다 불러내려 다섯째를 타이르기도 하고 무섭게 압력을 넣기도 하였으나 아들의 기독교 신앙을 꺾을 수 없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특히 어머니)없다>는 말처럼 부산에서 교회(제3영도)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받으면서 자취생활을 하고 있는 아들이 눈에 밟혀 어머니는 농산물을 화물차에 싣고 충무동의 <농협 공판장>으로 와서 도매로 넘기고 나면 간간이 영도에 있는 아들의 자취방을 찾으셨다. 그 순간만은 김씨집성촌의 매서운 눈길도, 조상제사라는 무거운 멍에도 다 잊어버리고 순전히 <母子之間>이 돼 아들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을 지어주시면서 <가족공동체>로부터 늘 소외당하는 다섯째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시었다. 신학대학원생이 돼 있는 아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하면 군대의 목사(軍牧)로 들어가게 된다고 하니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아들의 앞길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계셨다.
신학생인 아들은 어머니가 지어주신 따뜻한 밥을 먹으면서 당연히 전도를 한다. “어머니, 꼭 예수님을 믿읍시다. 저는 다른 아무런 소원이 없습니다. 오직 어머니께서 교회만 다니시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항상 어머니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아들아, 너는 시근도 없나? 내가 처해 있는 우리 가문의 상황에서 어떻게 교회를 다닐 수 있단 말인가? 그런 말 하지 말거라.”
사남매였던 부군(夫君)의 혈육 중 2남 1여가 어린 자녀들을 두고 일찍 세상을 떠나므로 시집의 그 많은 조카들을 힘이 닿는대로 보살피며 키우기도 하였다.
왜정시대 36년을 거의 온 몸으로 살아내었으며 8.15광복, 6.25의 처참한 전쟁 그리고 보릿고개 시절 그 암울한 세월들을 8남매를 지키면서 끈질기게 살아내었다. 그런데 한 권사님의 인생에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다섯째 아들이 목사(牧師)가 되겠노라고 신학교에 들어간 것이다. 그 아들이 이웃 마을에 있는 교회를 몰래 다니는 것을 눈치로 대충 알고 있었으나 그러다가 이내 그만 두겠지라고 짐짓 모른체하였다. 고등학생이 되면서는 더 노골적으로 아예 보란 듯이 교회를 다니는데 이제는 야단을 치고 타이르기도 해 보았으나 기를 꺾을 수 없었다. 객지에 나가있는 위의 형들을 다 불러내려 다섯째를 타이르기도 하고 무섭게 압력을 넣기도 하였으나 아들의 기독교 신앙을 꺾을 수 없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특히 어머니)없다>는 말처럼 부산에서 교회(제3영도)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받으면서 자취생활을 하고 있는 아들이 눈에 밟혀 어머니는 농산물을 화물차에 싣고 충무동의 <농협 공판장>으로 와서 도매로 넘기고 나면 간간이 영도에 있는 아들의 자취방을 찾으셨다. 그 순간만은 김씨집성촌의 매서운 눈길도, 조상제사라는 무거운 멍에도 다 잊어버리고 순전히 <母子之間>이 돼 아들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을 지어주시면서 <가족공동체>로부터 늘 소외당하는 다섯째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시었다. 신학대학원생이 돼 있는 아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하면 군대의 목사(軍牧)로 들어가게 된다고 하니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아들의 앞길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계셨다.
신학생인 아들은 어머니가 지어주신 따뜻한 밥을 먹으면서 당연히 전도를 한다. “어머니, 꼭 예수님을 믿읍시다. 저는 다른 아무런 소원이 없습니다. 오직 어머니께서 교회만 다니시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항상 어머니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아들아, 너는 시근도 없나? 내가 처해 있는 우리 가문의 상황에서 어떻게 교회를 다닐 수 있단 말인가? 그런 말 하지 말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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