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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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상에서 ‘적폐(積弊) 청산’이 유행입니다. 명색이 종교개혁 500주년인데, 교회부터 청산할 적폐가 없는지 응당 돌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교회의 적폐를 ‘교회의 오적(五賊)’으로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오적’은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주도했던 5인방을 가리키는데, 1970년 김지하(金芝河)가 동명의 시를 사상계에 발표하면서부터는,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라 이름하는 간뗑이 부어 남산만하고 목질기기가 동탁배꼽같은 천하흉포 오적”과 같이 풍자적인 의미로도 쓰였습니다.
2017년 기독교계의 한 SNS에 실린 ‘교회의 오적’도 마찬가지입니다. 글쓴이는 드럼, 대형스크린, 주여 복창, 단체급식 같은 성찬식, 청바지와 티셔츠의 싸구려 복식 다섯을 적시했습니다. 이 글 때문에 교회의 오적 논의가 활발해졌는데, 고신대 박영돈 교수는 한국
교회의 오적으로 “지도자들과 교인들의 부패, 복음의 변질, 양적 성장이라는 우상숭배, 그 전당으로서의 성전 건축, 교회 분열과 교회의 사유화”를 꼽았습니다. 주원규 목사는 “규모의 괴물, 표절의 왕국, 해석의 부재, 선민의식의 창궐, 상실의 시대”를 들었습니다. 이재화 변호사는 “자정능력이 없는 조직의 후진성, 권력욕에 물든 목회자, 삯군 목회자를 키우는 우매한 평신도의 맹종, 교회 안에 팽배한 반지성주의, 내부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사용되는 혐오”를 거론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 더 거대한 담론으로 한국교회의 오적 를 성찰해보려 합니다.

첫째는 ‘부재(Absence)’입니다. 이것은 성서 텍스트 해석의 부재(不在) 뿐만 아니라, 나아가 공시적인 통찰력의 부재, 통시적인 역사의식의 부재를 포괄합니다. 특히 후자의 둘은 젊은 계층이 교회로부터 이반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어왔다는 사실을 이제 한국교회는 정직하게 직시해야 합니다.
둘째는 ‘독재(Bonapartisme)’입니다. 많은 분들이 한국교회의 가장 심각한 현상 중 하나로 권위적인 목회자와 조직을 말합니다. 우매한 평신도의 맹종(盲從)이 더해지면서 한국교회는 ‘보나파르티즘’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권위적인 지도자에 대한 대중의 열광, 체제 안정과 과거로의 회귀 현상은 19세기 보나파르트주의입니까, 21세기 한국교회를 설명하는 말입니까?
셋째는 ‘상업교회(Commercial church)’입니다. ‘한국교회는 경건 대신 돈에 물들었다!’라고 말한다면 과잉일까요? 규모의 경제를 추구하고(교회의 대형화) 재벌의 팽창주의와 문어발식 확장(교회의 분점과 지점)을 답습하지 않았습니까? 교회는 기업이 아니며, 기업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아니 되지만, 한국교회는 유감스럽지만 상업교회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넷째, ‘이원론(Dualism)’입니다. 교회와 일상을 구분하는 성도들이 늘어갑니다. 세상 속의 교회가 되어야 함에도불구하고 교회는 수도원처럼 변해가고 주일은 개인적으로 쉼과 위로와 교제를 누리는 날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상에서는 세상 논리와 가치를 따르며 세상 사람들과 별반 차이 없이 살아가면서 갖은 문제를 일으키는 실정입니다.
다섯 째, ‘이기주의(Egoism)’입니다. 내가 사는 지역에 심지어 장애인시설까지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현상을 ‘님비(NIMBY)’라고 합니다. ‘님비’는 ‘우리집 뒷마당만은 안 돼!(Not In My Back Yard)’의 약자라면, 한국교회는 새로운 ‘님시(NIMCY)’의 조짐이 보입니다. ‘우리교회만 아니면 돼(Not In My Church Yard)!’ 내 교회만 생존하고 부흥하면 된다는 식의 진화론적 목회생태계가 문제입니다. 교회의 연합 정신은 사라지고 개교회주의만 팽배합니다.
김지하는 오적을 향해 이렇게 포효했습니다. “이놈들 오적은 듣거라 어명으로 체포하니 오라를 받으렷다.” 우리는 이렇게 읍소합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를 구원하소서.”(렘 17:14) 그렇습니다. 주님, 우리를 적들로부터 지키시고 구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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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오적(五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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