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1. 갑질과 마름: 중간 착취자의 나라
문화1.jpg▲ 영화 <군함도>의 마름
 
최근 우리 사회에 문제가 된 ‘갑질’은 전통사회에서 양반이 상놈을 부려먹는 작태가 왜곡된 방식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그리고 상놈끼리 서로 하대하는 ‘졸질’도 있다. 상놈끼리는 상대방이 이룬 성취가 하찮아 보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우습게 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갑질은 대부분 졸질의 변형이다. 그리고 이러한 갑질이 가능한 것은 빈부의 격차,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 사회의 양극화 때문이다.
 
『중간착취자의 나라: 비정규 노동으로 본 민주공화국의 두 미래』 (미지북스, 2017)에서 저자인 이한 변호사는 이렇게 말한다. “비정규직 제도가 개별 기업이 비용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개별 기업이 비용을 줄인다고 해서 그것이 꼭 그 사회의 생산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로 일자리의 대부분을 비정규직으로 채워 넣을 경우 그 사회의 생산성을 낮게 만든다는 유력한 근거들이 있다.”
 
이한 변호사는 이 책에서 비정규 노동과 이와 얽혀 있는 아웃소싱(외주), 파견, 위장 도급 전문 인력중개·공급업자, 그리고 그 위에 구축돼 있는 망국적 착취구조, 곧 인력중개·공급업자(업체)를 분석하며 중간착취자의 실체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를 위해 조선과 일제 강점기에 번성했던 지주-소작제의 핵심 장치였던 ‘마름’을 소개한다.
 
사실 마름은 소작인과 지주를 연결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대가를 받았다. 가령 중개 수수료를 한 번 받고 끝나는 부동산중개업자와는 달리 마름은 중개가 끝난 뒤에도 지주-소작 관계가 유지되는 동안 계속 그 대가를 받았다. 생산과 관련해 마름이 하는 역할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름에게는 자신의 기간설비도, 장비도, 경영계획도, 노하우도, 전문기술도 없었다. 그럼에도 소작인이 지주에게 바치는 소작료에는 지주가 마름을 육성·지원할 때 들이는 비용까지 포함돼 있었다. 따라서 소작인은 지주와 마름에게 이중으로 착취당한 것이다.
 
이러한 가혹한 이중착취 결과로 소작인은 농업기술 혁신·숙련 등을 통해 생산성을 끌어올릴 생각 자체를 포기했다. 더 생산해봤자 지주와 마름이 다 뜯어갔기 때문이다. 겨우 먹고살 정도만 남겨두고 다 가져가기 때문에 혁신을 위한 축적의 여지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생산성 발전이 없거나 아주 느리게 진행된다. 따라서 마름은 개별 지주에겐 큰 이익을 안겨주었지만, 나라 전체의 ‘국민경제’ 관점에서는 발전을 가로막은 기생적 중간착취자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지주가 마름을 육성한 것은 소작인들과의 직접 대면을 피하고 그들의 교섭력을 파괴하기 위해서였다.
 
소작인들이 요구사항을 들고 지주를 찾아가면 지주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과 계약관계를 맺은 것은 내가 아니라, 마름이니 그리로 가라.” 소작인들은 마름을 찾아간다. 그러면 마름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실질적인 결정권이 없고, 당신들 요구를 들어주면 나는 마름 노릇을 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당신들도 소작을 부칠 수 없게 된다.” 마름은 철저히 지주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 문제는 그런 식의 지주 이익 확보가 나라 전체의 이익과는 배치되고 사회 발전을 가로막으며, 구성원 대다수의 이익과 정의와 행복을 망가뜨린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한 변호사는 이렇게 말한다. “기업이 교육 훈련에 투자를 많이 하면 할수록 경제적 성과와 노동생산성이 늘어난다. 그리고 교육 훈련은 고용 관계의 안정성이 높아야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며, 이것은 다시 노동생산성 상승으로 이어진다. 반면에 비정규직 비율이 높으면 이직률이 높아지고, 교육 훈련율이 낮아지며, 노동생산성 향상에 부정적인 효과를 미친다. 다시 말해, 비정규직이 많아질수록 기업들의 생산성과 그 사회 전체의 생산성은 낮아진다.”
 
보이는가? 조선시대의 마름이 오늘날의 비정규 노동자들을 공급·관리하는 인력공급업체라는 것이? 지주는 자본가(기업), 소작인은 노동자이다. 대한민국은 이러한 ‘중간착취자의 나라’였던 것이다. 갑질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사실 헌법이나 근로기준법,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직업안정법 등은 이런 중간착취를 금하고 있다. 하지만 이 원칙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기가 막힌 것은 중간 인력공급업체는 마름처럼 생산을 위한 아무런 자체 기간설비도, 장비도, 경영계획도, 노하우도, 전문기술도 없다. 단지 사용자 즉 원청업체의 노동자 직접 고용과 관련 법적 규제를 회피하게 해주는 사실상의 인력관리 대행업자 역할을 하면서 번성하는 ‘중간착취자’, ‘기생충’일 뿐이다. 설비도 노하우도 돈도 사실상 다 대는 원청업체가 이처럼 인력공급업체를 앞세워 간접고용 형태를 취하는 이유는 바로 노조와의 직접 대면을 피할 수 있고, 인력조정과 낮은 임금 유지에 유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정규직 문제도 자본(기업)과 비정규직 간 모순에서 나오는 ‘비정규직 고유의 문제’이지, 사용자와 언론이 유포한 정규직-비정규직 간 갈등이나 ‘정규직 과보호’에 따른 노동자 간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물론 비정규직 제도는 고용과 정리해고를 통해 산업구조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게 하고, 수요 변화나 생산여건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해줘 산업 활동과 취업 기회를 높이는 등의 긍정적 기능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간제 비정규직의 직접고용’을 통해 달성할 수 있으므로, 도급이나 파견 등 간접고용을 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한 변호사는 이렇게 말한다. “결국 경제 효율성과 정의의 원칙을 만족시키려면 이렇게 편법을 동원하는 노동압착과 착취를 타파하고,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높여 그 결과물을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분배해야 한다.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공정한 협동의 조건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증가된 생산물을 비정규 노동자처럼 불리한 여건에서 가장 많은 부담을 지는 이들에게 더 많이 배분(전체 평균의 1.3배)해야 한다.”
 
‘특권층이 나머지 구성원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고비용 저효율의 병영국가’가 될 것인가?, ‘공정하고 협동하는 공화국’이 될 것인가? 대한민국은 지금 기로에 서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기득권층은 병영국가 쪽으로 나라를 이끌어 왔다. 그만큼 새하늘 새땅은 멀다는 이야기이다.
 
2. 양극화와 펭귄 프로젝트
문화2.jpg▲ <양극화 만평>
 
현재 영미권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회심리학자인 조너선 하이트(Jonathan Haidt)는 도덕심리학의 세 가지 원칙을 이야기한다. “첫 번째 원칙은, 직관이 먼저고 전략적 추론이 그 다음이다.” 우리는 보통 믿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이걸 믿어도 될까?”라고 물으며 믿어도 되는 이유는 찾지 않고, 믿고 싶지 않은 것이 있을 때는 “이걸 믿어야 해?”라고 물으며 믿지 않을 이유를 찾으려 한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두 개의 별개의 믿음 매트릭스에서 살아가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논쟁이 늘어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직관과 추론의 분리를 뜻한다.
 
도덕심리학의 “두 번째 원칙은, 바른 마음에는 다양한 힘이 있다.”는 것이다. 배려(Care), 공평함(Fairness), 자유(Liberty), 충성(Royal), 권위(Authority), 신성함(Sanctity) 등 도덕의 기반이 되는 가치들은 여러 가지이다. 그리고 진보와 보수는 이 중에서 각각 선호하는 가치가 다르며 같은 가치라도 다르게 해석한다. 가령, ‘공평함’이라는 가치에 있어서 진보는 1%의 사람이 전체 부의 43%를 가지는 것이 문제라도 본다. 그러나 보수는 기여한 바에 따라 가져가는 것이 공평하며 기여하지 않은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 부정한 것이라고 본다. 재미있는 것은 위 6가지 가치 가운데, 좌파는 ‘배려’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다른 가치들(가령, 충성이나 권위, 신성함)에 대해서는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반면 보수는 6가지 가치를 모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도덕심리학의 제3원칙이 등장한다. 하이트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바른 마음은 개인보다 집단의 차원에서 더 강력하다.” 지구상에서 혈연관계 없이도 집단적 협력을 보여주는 유일한 동물이 인간이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인류는 항상 무언가를 중심에 두고 모일 때 효과적인 팀워크를 발휘해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류처럼 플러스극과 마이너스극이 생기고 서로 상대방을 악마로 취급해왔다. 가령, 고대 마니교의 세계관에서 세계는 선과 악이 싸우는 전쟁터로, 선의 반대쪽인 악이 제거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인 대립이 심해지면 우리는 상대방과 함께 무언가를 할 수 없게 되고 민주주의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하이트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양극화가 심해지면 기본적인 인간에 대한 예의가 사라진다. 그리고 사회 전체의 신뢰도가 떨어진다. 이에 대한 고민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국가들 모두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사실 세계적 홍보컨설팅 기업 에델만은 2000년부터 매해 각국의 정부기관, 기업, 비정부기구(NGO), 미디어 등 4개 사회주체에 대한 신뢰도를 측정해 스위스 다보스포럼에서 발표해 오고 있다. 에델만코리아의 ‘2017 에델만 신뢰도 지표 조사(2017 Edelman Trust Barometer)’ 를 보면(조사는 2016년 10월13일~11월16일 조사됐으며, 총 1150명이 참여했다.) 한국인들의 정부, 기업, 미디어, NGO 등 4개 사회주체에 대한 평균 신뢰도는 38%로 나타났다. 전 세계 편균은 47%였는데, 크게 밑도는 수준인 셈이다. 조사 대상 28개국 중 23위를 기록했다. 에델만은 이 조사에서 60~100%는 신뢰국가, 50~59%는 중립국가, 49% 이하는 불신국가로 분류한다. 즉, 한국은 불신국가에 포함됐다.
 
특히, 기업 신뢰도가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해에는 33%였는데, 올해는 29%로 나타났다. 조사 대상 28개국 가장 낮은 성적이다. 기업 CEO에 대한 신뢰도 역시 24%로 나타나 지난해 35%와 비교해 11%p 떨어졌다. 정부 신뢰도도 큰 폭으로 떨어진 것으로 조사됐다. 올해 국민의 정부 신뢰도는 28%로 지난해(35%)보다 7%p 떨어졌다. 전세계 평균치는 41%인데, 절반을 조금 넘는 수준인 셈이다. 정부 신뢰도는 28개국 중 22위에 기록됐다. 정부 관계자에 대한 신뢰도는 17%로 전년(27%)보다 10%포인트 추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시스템이 제 기능을 하고 있다’고 답한 이들은 11%에 불과했다. 한국인 48%는 ‘사회 시스템이 실패했다’고 답했고, ‘사회 시스템에 확신이 없다’고 답한 이들도 41%에 달했다. 국민 10명 중 9명은 한국의 사회 시스템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셈이다.
 
펭귄 프로젝트가 있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 혐오 문화를 바꾸기 위해 대학 캠퍼스에서 벌어진 운동이다. 성폭력, 여성혐오에 반대하며 수도권 대학 12곳의 20여 단체가 함께하는 연합운동인데, 이 운동이 특이한 것은 ‘용기’와 ‘연대’의 뜻을 펭귄의 습성에서 가져왔다는 것이다. 가령, 펭귄 가운데는 무리를 위해 먼저 바다에 뛰어드는 ‘퍼스트 펭귄’이 있는데, 이는 용기를 보여준 것이며, 또한 영하 70도 남극의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서로 밀착하여 살을 맞대고 온도가 낮은 바깥쪽 펭귄들이 안쪽으로 조금씩 자리를 바꿔가며 이동하여 체온을 유지하는 펭귄의 ‘허들링(Huddling, 물결처럼 안과 밖의 위치를 바꾸는 것)’은 연대의 중요성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양극화의 세상이 펭귄의 용기와 연대의 정신으로 어떻게 변해야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3. ‘멈춤, 낮춤, 갖춤, 맞춤.’
‘멈춤, 낮춤, 갖춤, 맞춤.’ 인간의 욕심에서 비롯된 계란 파동에 관해 대증요법(symptomatic therapy)이나 미봉책으로 어물쩍 넘기지 말고 근본대책을 강구해야한다며 한양대 유영만 교수가 제안한 네 가지 ‘춤’이다. 이것은 계란 파동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중요한 인문학적, 신앙적 통찰이 될 것이다.
 
첫째, 멈춤. 유영만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춤은 멈춤의 연속이다. 멈춤이 없이 추는 춤은 춤이 아니다. 끊임없이 물 흐르듯 이어지는 춤은 사실 멈춤의 연속이다. 멈춤은 다음 동작을 위한 짧지만 깊은 성찰의 시간이자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결정하는 결연한 순간이다. 멈춰 있지만 사실은 치열하게 고민하고 사유하는 시간이다.” 그렇다. 검도에도 ‘중단 겨눔’이 있다. 멈춰 있지만 상대의 마음을 읽어내는 치열한 전투의 시간이다. 다음 전투를 위한 치열한 멈춤이자 푹풍전야의 긴장감이 감도는 순간인 것이다.
 
둘째 낮춤. “모든 춤은 자신을 낮추면서 세상을 끌어안고 우주에게 마음을 열고 자연과 대화하는 몸동작이다. 나를 낮추고 상대를 높이면 저절로 나도 높아진다. 자세를 낮추면 자신의 인격은 올라간다. 낮춤은 겸손함을 표현하는 자세이자 다름을 포용하겠다는 태도다. 낮춤 없이 추는 춤은 허공에 들떠 떠다니는 환상이나 망상의 춤이다.”
 
세 번째 갖춤. “모든 춤은 춤의 기술과 기교 이전에 갖춰야 될 게 있다. 춤의 본질에 대한 깊은 이해는 물론 춤을 추는 사람의 자질과 품격이다. 격이 있는 춤은 기법과 기교의 산물이 아니라 춤에 임하는 사람의 자세와 자질, 품성과 인격의 문제다. 춤은 나를 세상에 드러내는 매개체다. 내가 추는 춤이 바로 나다. 춤은 내가 살아온, 살아가는, 살아가고 싶은 삶을 표현하는 욕망의 분출구다.”
 
네 번째 맞춤. “맞춤은 상대의 아픔에 귀 기울이고 들어보려는 경청의 자세이자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하모니를 이루어보려는 노력이다. 맞춤은 나를 먼저 드러내기보다 상대를 위해 내가 무엇을 도와주고 지원해줄 수 있을지 알아보려는 애쓰기다. 맞추지 않고 추는 춤은 자기 욕구만 일방적으로 발설하는 난장판의 춤이다.”
 
우리의 신앙에 이 네 가지 춤이 필요할 것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한 번도 춤을 추지 않는 날은 헛된 날이 되게 하라.” 우선, 멈춤은 인간의 욕망에 대한 멈춤일 것이다. 그리고 낮춤은 인간의 교만에 대한 적절한 대안이다. 갖춤은 인간을 넘어 종들 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이며, 맞춤은 사람다운 세상을 위해 필요한 덕목들을 갖추는 것이다.
 
따라서 갑의 갑질도 없어야 되겠지만, 을들이 을들끼리 서로에게 졸질 하는 세상이 아니라, ‘최고의 갑중에 갑’이신 창조주께서 ‘을 중의 을’이 되신 성육신 사건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또 며느리는 나이 드신 시부모에게 갑질 하지 않는 것, 친구들끼리 갑질 하지 않는 것, 조금 불편한 사람을 다르다고 갑질 하지 않는 것, 땀 흘려 일하시는 노동자들의 그 땀 냄새가 역겹다고 갑질 하지 않는 것, 아파트 입주민들이 경비원 아저씨에게 반말하며 갑질 하지 않는 것, 주유소나 편의점 등에서 알바하시는 분들, 비정규직이라고, 전임이 아니라고 갑질 하지 않는 것, 직분 받았다고, 출세했다고 갑질 하지 않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언젠가 정말 큰 갑질은 최고의 갑인 신께서 반드시 심판 하실 것이다.
 
최병학 목사.JPG
 
 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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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31 : 양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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