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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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9년 8월 초 부산으로 온 게일은 초량에 거주하며 부산을 선교거점으로 성경보급소를 설치하고 선교활동을 전개하려 했으나 1890년 5월말 부산을 떠나게 된다. 부산에 선교본부를 설치하고자 했던 그가 왜 10개월 만에 부산을 떠나게 되었을까? 사실 게일이 부산에 체류하고자 했던 것은 서울을 피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당시 다수의 선교사들이 서울에 체류했는데, 선교사들 간의 불화나 대립이 심각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마찬가지. 미국 선교사들, 아니 북장로교 선교사들 간에도 긴장과 불화가 장난이 아니었다. 알렌과 언더우드, 알렌과 헤론 사이의 갈등은 1885년 8월부터 시작되었고, 1887년 알렌이 미국공사관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는 언더우드와 헤론 간의 갈등으로 발전했다. 선교사들 간의 갈등은 상호 고통과 아픔이었다. 이런 선교사들 간의 긴장과 대립을 피하고자 했던 점도 게일이 부산에 체류하고자 했던 한 가지 이유였다. 이 점을 잘 보여주는 흔적이 게일이 부산 체류시에 쓴 ‘내전’(Civil war)이라는 글이다. Knox College Monthly 1890년 2월호에 게재된 이 글은 1889년 말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 글에서 선교사들 간의 대립, 곧 어깨를 맞대고 형제처럼 일해야 할 선교사들이 서로를 향해 총을 쏘는 현실을 ‘내전’이라고 불렀다. 게일은 서울에서 일하는 선교사들 사이의 경쟁과 대립을 체험하고 이를 고발형식으로 쓴 것이다. 이런 선교사들의 다툼, 패권 경쟁이 게일로 하여금 서울이 아닌 미개척지 부산에서 일하게 되는 심리적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데 게일은 부산 도착 이후 누나 제니(Jeni)에게 보낸 편지에서, “부산은 앞으로 나의 집이 될 것이다(will be my home hereafter). ... 다른 모든 선교사들은 서울에 밀집해 있지만 내가 서울에 머물러 있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까지 했으나 그가 10개월 간 부산에서 일하고 철수를 결정하게 된 것은 헤론의 영향 때문이었다. 1885년 6월에 내한한 헤론 의사(Dr John William Heron, 1856-1890)는 제중원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부산에 주제하고 있던 영국 세관원 존 헌트(John H. Hunt, 河文德)의 딸 치료차 1890년 5월에 부산으로 오게 되었다. 이 때 캐나다 출신 독립선교사 펜윅(Malcolm C. Fenwick, 1865-1935)과 동행했다. 펜윅은 1889년 12월 11일 부산으로 입국하였는데, 다시 부산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이때 헌트의 딸은 19세 전후로 추정되는데 콜레라에 감염되어 있었다. 이 딸이 경남 양산시 상북면 대석리 출신 권순도(權順度, 1870-?)와 사랑에 빠졌던 바로 그 여성이었다. 부산에 온 헤론은 게일을 만나게 되었고, 게일에게 서울로 가서 함께 일할 것은 제안했다. 유영식 박사는 부산의 삶의 환경이 열악했고 비위생적이었기 때문에 서울로 가서 함께 살자고 제안한 것으로 말하고 있으나, 사실 게일이 살던 집은 열악하지 않았고 공기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게일이 부산을 철수 한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때가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가 사망한지 1달 정도 지난 때였으므로 데이비스의 죽음이 게일의 부산철수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결국 게일은 부산을 떠나기로 작정하고 5월 말경 서울로 갔다. 그리고 헤론 집에서 기거하며, 사무엘 마펫이 책임지고 정동의 예수교학당에서 교사로 일했다. 원래 예수교학당은 언더우드가 설립한 학교인데 안식년으로 귀국하게 되자 마펫이 관장하고 있었다. 이런 일로 게일은 마펫과 친근하게 되어 1891년 2월 말에는 함께 북한과 만주지방으로 선교여행을 다니게 된다.
그런데 게일이 헤론의 집에 기거하며 헤론 가족과 같이 지낸지 불과 두 달 만에 헤론이 사망했다. 이날이 1890년 7월 26일 토요일 오전 8시였다. 헤론은 게일의 건강을 염려하여 서울로 데려갔으나 자신이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다. 헤론의 사인은 과로사라고 하지만 마펫은 선교사들 간의 불신과 갈등이 보다 큰 원인이었다고 지적한다. “저는 헤론 의사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다른 것 보다, 과로보다, 바로 이것이라고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헤론 의사처럼 철저히 이타적이고 헌신된 선교정신을 가진 자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동기가 의심을 받고, 헌신이 의심받고, 사역이 오해받는다는 생각에 이루말할 수 없이 걱정하고 초조해하고 슬퍼했는데, 정신적 갈등이 심해서 쇠약해졌습니다.”
헤론이 사망하자 미망인 젊고 아름다웠던 헤리엇 깁슨(Harriet Gibson)을 연모하는 두 사람이 있었다. 게일과 마펫이었다. 친한 친구였던 두 총각 선교사는 경쟁자가 되었다. 게일이 헤론 집에 식객으로 있을 때의 연인지 몰라도 두 딸을 가진 헤론의 미망인은 1892년 4월 7일 게일과 결혼했다. 이때 게일은 29세였고 부인은 32세였다. 결혼하던 그해 6월 게일 부부는 원산으로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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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부산기독교이야기 15] 게일의 부산에서의 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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