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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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입니다. 고대하던 비도 내렸고, 이제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유행가 가사처럼 ‘세상 모든 것이 다 변해가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예전에는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현상들이 해가 갈수록 새롭게 생겨납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도 유기동물(遺棄動物)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해마다 휴가철이면 강아지만 해도 수만 마리가 버려진다고 합니다. 가족처럼 돌봄을 받는데서 반려견(伴侶犬)이라 불리던 강아지들이 순식간에 천덕꾸러기 흉물 취급 받는 유기견(遺棄犬) 신세로 전락한다는 것입니다. 한 해 평균으로 치면 약 10만 마리나 된다고 합니다. 반려동물에는 개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반려동물들이 버려지고 있는 걸까요? 유기된 그 동물들은 또 어떻게 되는 걸까요?
마하트마 간디의 말입니다. “한 국가의 위대함과 도덕적 진보는 그 나라의 동물이 받는 대우로 알 수 있다.” 우리는 어떤가요? 고양이가 사람을 보고 도망가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직접 확인해 보지 않아서 속단할 순 없겠지요. 하지만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고아 수출 1위 국가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는데 이제는 유기견 수출까지 적어도 OECD 국가에서는 1위를 차지했다는 분명한 통계 앞에서는(장윤재, 『포스트휴먼신학』, 125) 부끄러움을 면할 길이 없어 보입니다. 유기견 문제야 드러나기라도 했다 칩시다. 수많은 실험실과 연구기관에서 별다른 관리나 제재 없이 시행되고 있는 각종 동물 실험과, 육류의 대량생산을 위해 끔찍한 환경 속에서 사육되는 소나 돼지 그리고 가금류(家禽類)의 실태는 어떻습니까? 수년 전 구제역 파동으로 수백 만 마리 동물이 살처분(殺處分) 당할 때에는 어떤 반응이 있었습니까? 또 어떤 대책이 마련되었던가요?
원래부터 그랬던 우리가 아니었습니다. 반려동물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에도 우리는 동물을 학대하거나 버리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과일조차 다 따지 않고 새들을 위해 까치밥을 남겨놓는 그런 민족이었습니다. 특별히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동물은 한 식구(食口)처럼 대했습니다. 한자로 ‘집 가(家)’ 자체가 한 집에서 거하는 동물을 상징하는데서 유래했을 정도입니다. 지금은 반려견을 키우는 사람만 1,200만이라고 합니다. 인구의 1/4 이상이 동물과 함께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휴가철만 되면 이 난리가 벌어지는 걸까요? 지금도 어느 곳에서 생매장당하고 살처분되고 있을 동물들에 대해서는 어쩌면 그렇게 다들 무관심할까요? 피터 싱어(Peter Singer)는 “동물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한 모든 인간은 나치다”라는 충격적인 얘기를 했다는데, 우리들 또한 겨우 포식(飽食)이나 성장(成長)이라는 미명 하에 동물을 잔혹하게 학대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공교롭게도 1,200만이라는 숫자는 개신교인과 천주교인을 합친 대한민국 기독교인의 숫자와 같습니다. 세상이 냉담하고 무관심하다면 그리스도인들이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중세의 성자라 추앙 받는 프란체스코는 태양과 바람과 불을 형님으로, 달과 물과 대지를 누님으로 부르는 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20세기 들어와서도 『생태주의자 예수(Der Oklogische Jesus)』를 쓴 프란츠 알트(Franz Alt) 같은 사람들은 또한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명체는 모두 친척뻘이다. 인간이건 동물이건 식물이건 아버지는 한 분인데 곧 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는 왜 그럴 수밖에 없습니까?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창 9:9-10) 하신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피조물 또한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을 바란다”고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롬 8:21-22). 이번 여름부터라도 반려견과 유기견만이라도 다시 한 번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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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반려견과 유기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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