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칼럼] 정유년을 맞으며
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들을 베다
정유년(丁酉年) 벽두(劈頭)부터 문득 가덕도(加德島)를 들러야 할 것 같았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입소문을 타고 살이 바짝 오른 제철 대구처럼 밀려들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 의아할 무렵 작년 내린 집중호우 탓에 토사와 바위가 쏟아져 입산금지가 되었다는 팻말이 기도원 진입하는 입구에서 겨울 나그네들을 반겨주었습니다. 등 뒤론 제법 시린 바람이 길을 재촉하는데 앞으로는 코발트빛 겨울바다를 반사경 삼아 내리쬐는 겨울햇살 탓에 선글라스를 준비한 동행의 지혜를 감탄할 수밖에 없었던 뜻밖의 인적 없는 해안은, 입 대신 눈을 뜬 채로 완벽하게 어우러진 전능자의 창조와 구원의 경륜을 찬양하게 만드는 그 자체로 견줄 데 없는 기도길이었습니다.
“정유년 그해 초봄, 가덕 방면 전투는 헐거웠다. 적의 전투의지가 내 몸에 전해지지 않았다. 전투라기보다는 부지런히 잡초를 뽑는 농사일 같은 느낌이었다. 가덕 해역으로부터 함대를 철수시켜 한산 통제영 모항으로 돌아오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의금부 도사는 선착장에서 나를 묶었다.”(김 훈, 『칼의 노래』, 20) 1597년 1월 하순, 조정에서 연이어 벌어진 어전회의에서 선조(宣祖)는 이순신을 군령 위반과 허위 보고를 이유로 치죄하기 위해 체포령을 내렸습니다(선조실록 1. 23, 27). 2월 26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한산 통제영에서 그렇게 붙잡혀 한양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악의에 찬 모함과 잔인한 고문 그리고 모친상의 비극이 이어지는 사이, 왜적(倭敵)들은 14만 대군을 앞세워 재침을 감행합니다. 또 하나의 전쟁 정유재란의 시작이었습니다. 전도서 기자가 하늘 아래 새것이 없다고 한 말은 옳았습니다. 정확하게 일곱 갑자의 시간이 흐르고 난 2017년의 정유년 또한 분별력 없는 위정자들이 토설해 놓은 혼돈을 감당하느라 민초들만 분주(噴走)합니다.
이듬해 이순신은 노량 해전에서 임진년 옥포 싸움 때의 그것보다 훨씬 더 깊은 총상을 입은 채 이런 말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지금 싸움이 한창이다. 너는 내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 북을 계속 울려라!” 김훈은 정유년을 중심으로 이순신을 묘사하면서 소설의 끝을 이렇게 맺습니다. “세상의 끝이····· 이처럼····· 가볍고····· 또····· 고요할 수 있다는 것이·····, 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들을····· 이 세상에 남겨놓고····· 내가 먼저·····, 관음포의 노을이····· 적들 쪽으로·····”(『칼의 노래』, 342).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들이 존재합니다. 400년 전 가덕도 앞바다에도, 4,000년 전 홍해 앞바다에도, 칼로 벨 수 없는 적들이 있었습니다. 이순신을 포함해 그 누구도 이 싸움에서 이길 장사가 없었습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도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이 싸움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케이블 tvN <도깨비>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대판 도깨비는 전래동화처럼 투박한 방망이가 아니라, 커다랗고 신비로운 검을 사용해서 달려오는 차량도 쪼개고 악령도 소멸시키며 사랑하는 사람을 지킵니다. 사람들이 이 드라마에 열광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실타래처럼 얽혀버린 난맥(亂脈)을 그 옛날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을 단칼에 잘라버렸던 알렉산더 같은 이가 나와 해결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들을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검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해골 언덕에 깊이 박힌 그 십자가야말로 누구도 뽑을 수 없고 그 어떤 것도 베지 못할 것이 없는 신령한 무기입니다. 정유년을 시작하며 가덕도에서 바라본 하늘과 바다처럼, 사람들 사는 땅 위에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검이 만들어내는 화평의 장관이 펼쳐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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