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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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이 어떻게 될지에 관심이 많다. 지금 나의 선택이 미래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지금은 잘되는 것 같은데 마지막까지 잘 될까? 아니면 지금은 어렵지만 나중에는 잘 되지 않을까? 여기에서 섭리(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와 예견(내 그럴 줄 알았다)이 나오게 된다. 섭리란 하나님께서 삶의 매 순간 역사하시기 때문에 지금 어려워 보이지만 마지막에는 잘 되는 것이고, 예견이란 이 땅에서는 잘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은 망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것은 섭리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선과 의를 행하면서 온갖 어려움을 겪는 것이 당장은 고통스러워 보이고 어리석고 약해보일 수 있지만 그 속에 사랑과 선이 있기 때문에 천국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반면에 야고보서에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의 옷은 좀 먹었으며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라는 말씀은 예견에 해당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힘과 권력과 거짓된 방법과 다른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면서 돈과 기업과 건물과 지위를 얻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신나는 일이겠는가? 그러나 그 속에는 거짓과 악이 있기에 결국은 죽음의 길이라는 말이다.
우리 옛말에 ‘바늘 도둑이 소도둑이 된다.’는 속담이 있다. 바늘을 훔칠 때 두려움과 가책을 느껴서 돌이키면 이것은 섭리에 해당되고, 소를 훔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도리어 즐거워하고 자신을 자랑하면 이것은 도살할 날을 위해 살찌우는 예견에 해당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은 처음에 죄를 지으면 걱정하고 두렵고 괴롭기 때문에 어떻게든 치유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돈과 권력을 가진 지배자가 되어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부리게 되면 분명히 악인데도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즐거워하는 것을 본다. 이 정도까지 오게 되면 이미 거짓과 악을 옹호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다가 발각되면 눈물을 흘리면서 “미안하다, 잘못했다, 용서해 달라.”고 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후회한다. 그런데 그 의도가 더 이상의 쾌락이나 돈, 권력을 누리지 못하고 잃어버릴 지경이 되었기 때문이라면 이것은 앞으로의 삶이 죽음으로 향하는 예견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고 거짓눈물로 위기를 벗어난 다음에는 또다시 쾌락과 권력을 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술에 중독되어 있는 남편이 술 마시고 집에 들어오면 늘 “미안하다. 다시는 술 먹지 않겠다. 한번만 용서해줘”하면서 다음에 또 반복된 행동을 한다. 또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그 죄가 발각되어서 벌을 받을 지경에 울면서 “용서해 달라.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하면서 다시 반복하는 것은 예견에 해당되는 것이다. 
만약에 내가 ‘돈과 쾌락과 권력 때문에 잘못을 저질렀다. 이제 모든 잘못한 것을 털어놓고 그에 합당한 벌고 다시는 거짓과 악을 행하지 않겠다.’고 하면 이 사람의 삶은 섭리에 해당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성경의 삭개오가 세리와 로마의 앞잡이로 권력을 이용하여 많을 세금을 거두었다. 일부는 로마에 바치고 나머지는 자신이 착복했다. 나중에 예수를 만나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서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모습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섭리에 해당되는 것이다. 
예견의 삶은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며, 섭리의 삶은  어려운 것처럼 보이지만 생명으로 가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매 순간 자신을 돌아보며 주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추구하며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섭리 속에 살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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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칼럼] 섭리와 예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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