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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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 경남노회(노회장 이인규 목사)가 노회 역사를 담은 100년사를 출간했다. 지난 6일, 교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사림교회에서 출판기념세미나를 가졌다.
이에 앞서 K장로가 교계 인터넷 매체를 통해 기고문을 올렸다. 그는 기고문에서 경남노회 100년사에 게재된 故 송상석 목사에 대한 친일, 반기독교적 행적을 비판했다.
교단의 역사기록을 올바른 인식을 가지고 사실을 적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마땅하다. 그러나 송상석 목사가 얼마만큼 회개하고 과거의 잘못을 돌이켜 선한 일로 일관 했는지 새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울이 바울이 된 전철 밟은 송상석 목사의 고백담
사울은 믿음의 형제들을 찾아다니면서 결박하고 심지어는 스데반을 돌로 죽이는데 주역이었다. 하지만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고 복음의 전령자가 됐다.
위대한 전도자로 결국 순교의 대열에서 주님을 위해 바친 그의 행적을 보고 역사가들은 나쁜 자로 낙인찍어 쓰레기 취급했던 글을 보았던가? 친히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한 바울은 위대한 복음의 업적에 찬사를 보내도 아깝지 않다.
필자가 교계 기자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1978년 10월 어느 날, 송상석 목사가 자주 숙식했던 중구 보수동 애린유스호스텔에서 교계 기자 몇 사람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곳은 그의 딸과 사위 故 한남석 장로가 운영하던 곳이기도 했다. 
그때 한창 이슈가 된 구포 70만평 위에 용호동 나환자들의 정착촌을 위해 쓰일 땅이 한상동 목사가 하병국 목사에게 이사장 바통을 넘겨주고 하 목사가 미국 유학 갈 때 다시 김진경 교수한테 그리고 그의 친구 김상원 장로에게 넘겨주는 과도기 때에 구포 땅을 찾는 일에 매진하는 열정을 보였다. 그때부터인지는 몰라도 기자의 눈에는 故 한상동, 한명동 목사 형제를 그렇게 좋은 감정으로 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총회 안에는 송상석 목사를 추종하는 경남노회와 한상동 목사를 지지하는 부산노회의 두 산맥이 서로 갈등과 이해 속에 사사건건 충돌하는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기자 근성으로 “송 목사님, 과거 일제시대에 고등계 형사직을 갖고 있었던 일이 있습니까?”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송 목사는 처음에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다시 미소 띤 얼굴로 “그것이 그렇게도 궁금했느냐”고 반문해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송 목사는 서서히 그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젊은 날에 잠시 뭣 모르고 택한 일이 있지요. 그때는 예수를 믿지 않던 젊은 30대였고, 그 직이 괴롭고 해서 1919년 통영군 원량면에 있는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때 예수를 믿게 된 것이지. 그런데 말이여, 참 하나님은 오묘한 섭리로 나로 하여금 만주 봉천에 있는 박형룡 박사를 모셔 오는데 그 형사 신분증이 얼마나 유익을 주었는지, 검문검색이 많은 그 당시 이 형사 신분증을 최대한 활용하여 용케도 통과하여 박형룡 박사를 모셔왔던 것이야. 내가 죄인 되었을 때 교인을 핍박한 사도바울처럼 회개한 후로 1935년 미성년자를 상대로 한국교회에 금연, 금주 절제운동을 펼친 것 등 주님의 일에 앞장 선 교단의 굳은 나쁜 일들은 내손에서 만들어지거나 법적인 문제마다 현실 법을 알았던 관계에서 도움을 주 것만은 사실 이라네 그 고약한 형사 닉네임만은 나의 어두운 그림자로 자리 잡아 상대방들이 늘 우려 먹는 도구라네. 어찌 하겠나. 죄인이었던 그때를 지울 수는 없지 않는가. 이제 궁금증은 풀어졌는가요. 신 기자님”라 하지 않는가. 나는 몹시 미안한 감이 들었다. 이후로 고신총회는 신학에 박윤선, 신앙에 한상동, 행정에 송상석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송 목사는 필자와 같은 마산문창교회를 다니면서 세례교인이고 마산고교 시절 기독학생운동(SFC) 출신인 점을 알아서 소상하게 얘기해주었다.
한편, 부민교회당에서 열렸던 총회에서 지덕용 장로가 취급, 보관했던 목회자 은퇴금(은급금)부도 건이 터지자 송 목사와 한상동 목사 측 계열과 맞붙어 성토당한일이며 김희도 목사와 윤은조 장로가 학교법인 이사허위 기재 등록한 공문서 위조로 검찰에 고발되어 피고가 된 사실 등의 교단의 검은 역사의 언저리에는 송상석 목사는 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었으며, 피나는 그의 끈기와 집념이 교단과 경남노회 법통노회로 지켜 계승하려는 그의 믿음의 의지를 엿볼 수가 있었다. 성경의 기자들 2000년 당시 예수의 행적을 기록한 것처럼 산 역사의 현장에 지켜보아 온 사실은 사실대로 기록하고 싶은 것이다. 한상동 목사나 송상석 목사 모두가 교단을 위해 헌신한 지도자이고 나쁜 과거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교단을 위해 한 몸을 던진 숭고한 교단의 헌신자들임에는 부인 못 할 팩트다.
지금에 와서 친일행각 여부를 들춰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헛되고 헛되다는 전도서 기자와 같은 세월 속의 지나간 그림자일 뿐이다. 어쨌든 이번 경남노회 100년사를 쓰기위해 역사 편찬위원 목사, 장로들 관계자들이 수고한 값어치가 100년사의 역사실록이 탄생된 것이다. 경남노회, 그것도 법통을 붙인다는 의미도 아마 법에 밝은 송상석 목사가 놓은 초석 때문이 아니었나, 매우 자랑할 만한 이유도 묻어놓고 있어 축하할 제목이다.
송 목사는 1929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것이며, 1932년 채필근, 조만식 장로와 함께 조선기독교 절제운동회를 조직해 1935년 미성년자 금주, 금연법 제정을 위해 손가락을 자랐던 것을 보고 마치 마태 제자가 예수 스승의 십자가 흔적을 손으로 만져보고서 참인줄 알았던 사실은 기자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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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 경남노회(법통) 100년사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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