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문화를 읽고 그 속에 감춰진 신학과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펼치다 보니, 안목과 시선이 날로 새롭게 변해가기도 하지만 기발하거나/엉뚱해지기도 한다. 여기 엉뚱한 깡통 철학이자 깡통 신학 몇 가지를 소개해보니 독자들은 웃어넘기시기 바란다.

1. 곡선의 신학
직선과 곡선.jpg▲ 곡선과 직선
 
2016년을 10년 정도의 근시적인 눈으로 보면 ‘사드’라든지, ‘경주 지진’이라든지 ‘최순실과 K스포츠, 미르재단’이라든지 하는 것으로 역사에 남겠지만, 100년 정도의 역사적인 안목으로 보게 되면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에서 인간이 4대 1로 졌다’는 것과 또한 ‘포켓몬고 열풍’을 들 수 있다. 바로 4차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은 ‘2016년 국민미래포럼’에서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1등만 살아남습니다.”라고 말한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 가상현실(VR) 등의 신산업이 주도할 미래는 가장 빨리 관련 기술을 개발한 기업이나 국가가 계속 시장을 주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3가지로 볼 수 있다. ‘자동화, 융합화, 연결화’가 바로 그것이다. 인공지능이 발달하면서 자동화는 가속화될 것이고, 개별적으로 발달한 다양한 정보기술은 융합되어 연결될 것이며 생각지도 못한 변화와 혁신이 일상화되는 것이 바로 4차 산업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아날로그의 여유로운 곡선’을 ‘디지털의 빠른 직선’으로 만든 것이다. 디지털의 직선은 자동화와 가속화를 상징한다. 모든 ‘실재적인 것’은 시공간의 4차원을 가지고 있지만, 디지털화를 통해 차츰 4차원에서 움직이는 입체는 조각품의 세계(시간 없는 입체)→ 그림의 세계(깊이 없는 평면)→ 텍스트의 세계(평면 없는 선)→ 컴퓨터화 된 세계(선 없는 점들)로 요약되는 자동화와 가속화, 그리고 디지털화의 추상게임을 시작한다. 이렇게 파시스트적인 속도로 변화되어가는 세상 속에서 양적 성장은 당연하고, 더 많은 양을 획득하려면 더 빨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속도를 내야 한다. 이처럼 속도와 양적 성장과 목표지향적인 직선의 가치관이 오늘 화살처럼 창처럼 사회와 세상과 교회와 교인들, 특히 목회자들에게 몰아치고 있다.
그러나 자연은 본래 곡선이었다. 곡선인 자연을 인간이 직선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직선의 마음은 급하게 지식을 만들어내려고 하고, 급하게 일을 처리하려고 하며 획일적이다. 하지만 곡선의 마음은 때를 기다리며 곰탕과 같이 우려내어 지혜를 잉태시킨다. 따라서 스페인의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Antonio Gaudi)는 이렇게 말한다. “직선은 인간이 만든 선이고, 곡선은 신이 만든 선이다.” 오스트리아의 화가이자 건축가인 훈데르트바서(F. R. D. Hundertwasser)도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강조하면서 “직선은 신의 부재”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서 깡통신학 하나!
성경은 하나님의 곡선을 인간이 직선으로 만든 사건들의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선악과 사건으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이르기까지! (직선과 같은) 인간의 교만과 탐욕은 속도와 성장의 다른 이름으로 (신(神)인) 곡선을 지워버린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직선의 획일성과 가속성에 곡선으로 튕겨져 나가 부활하신 예수님은 교만하고 강팍한 직선들 위에 부드러운 곡선으로 다시금 재림할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2. 거미 신앙
“스피노자가 기거하는 방에는 거미 한 마리가 왕으로서 살고 있다. 그러나 이내 스피노자가 길거리에서 동종의 거미를 구해와 그만의 세계에 개입시킨다. 자신의 의지와 타인의 의지와의 충돌이 일어나고 하나의 세상에서 ‘왕’이 되기 위해 그들은 싸움을 벌인다. 스피노자는 이에 그치지 않고 파리 한 마리를 거미줄의 세계에 집어 던진다. 그 거미들은 파리를 잡아먹고 다시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 싸움을 벌인다.”
거미.jpg▲ 긴호랑거미
 
종교적 박해와 빈곤 그리고 불치의 질환과 항상 싸워야 했던 고독한 철학자 스피노자(Benedict de Spinoza)는 그 불행한 가운데서도 마음의 평화와 삶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평범한 실천 속에서 조용한 기쁨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거미가 집을 짓는 과정을 바라보며(혹은 거미들의 싸움을 보면서) 기뻐하곤 했는데, 거미를 통해 자신의 철학을 엮어가는 큰 보람과 기쁨을 찾은 것은 아닐까?
인간은 거미처럼 자유의지로 자신의 세상(비록 거미줄 위의 세상이긴 하지만)을 만들며 살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어떤 ‘의지’(위 인용구에 의하면 스피노자를 통한 동종 거미같은 것이긴 하지만, 인간 세상의 유행, 관습, 규범, 제도, 사회, 국가라는 운명의 울타리이기도 하다.)와 대립하며 충돌하고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며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비극적 존재이기도 하다. 스피노자의 거미의 자유의지에서 긍정적인 측면을 발견한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철학적 동물은 올빼미가 아니라 거미이다.”
사실 거미는 빛을 보지 못한다. 어떠한 빛의 형상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거미는 자신의 다리로 세상과 소통한다. 촉각으로 전해오는 미세한 파장에 반응해서 소통하는 것이다. 따라서 들뢰즈는 거미의 집짓는 과정이나 동종간의 싸움 등에 흥미를 느낀 스피노자와는 달리 거미의 타고난 비자발적 신체구조에 흥미를 느낀다. 들뢰즈의 말을 들어보자.
“거미는 거미줄 꼭대기에 올라앉아서, 강도 높은 파장을 타고 그의 몸에 전해지는 미소한 진동을 감지할 뿐이다. (…) 이 거미는 오직 기호에 대해서만 응답한다. 그리고 미소한 기호들은 거미에게로 침투해 들어간다. 이 기호들은 파장처럼 거미의 신체를 관통하고 그로 하여금 먹이에게로 덤벼들게 만든다. (…) 거미줄과 거미, 거미줄과 신체는 하나로 접속된 기계이다. (…) 비자발적인 감수성, 비자발적인 기억력, 비자발적인 사유는 (…) 매순간 강렬한 전체적 반응들 같은 것이다(『프루스트와 기호들』277-278).”
스피노자의 인간 세상의 유행, 관습, 규범, 제도, 사회, 국가라는 운명의 울타리이기도 한 타자의 의지, 혹은 신의 의지는 들뢰즈의 말로는 ‘홈이 패인 공간, 정주적 공간, 국가 장치에 의해 설정되는 공간’인 것이다. 이에 대립되는 것으로 들뢰즈는 ‘매끈한 공간, 유목적 공간, 전쟁 기계가 전개되는 공간’을 언급한다. 따라서 들뢰즈는 고정 불변의 이상향(이데아나 천국)을 향해 뻗어 있는 홈-패인 길(이것은 직선일 것이다.)을 건설하는 철학을 비판하며 올빼미로 상징되는 전통의 철학서와는 다른 글쓰기의 방식을 추구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들뢰즈의 거미의 철학은 비자발적 노출에 놓여진 감각을 중시하고 따라서 매순간 생동하는 시간을 살아가는 거미의 차이 생성을 찬양한다. 그것은 홈 패인 공간이 아니라. 매끄러운 공간으로 미끄러져 가는 공간, 유목적 사유, 노마디즘인 것이다.
여기서 깡통신학 둘!
성경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율법과 그로 인해 만들어진 홈 패인 직선의 공간 속에서 그것을 가로질러 미끄러져간 사유와 실천의 기록이 아닐까? 따라서 예수님의 신앙을 거미의 신앙이다. 홈 패인 직선의 획일성과 고정 불변한 이념을 곡선으로 미끄러져 튕겨져 나가 부활하신 예수님은 정주적이며 국가 장치에 의해 설정된 이 폭압적인 자본주의 세상을 새롭게 만드시기 위해 다시금 재림할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3. 색깔 목회
우리말 가운데 ‘새빨간 거짓말’은 흰 것을 오염시키는 색깔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는 표현이다. 서양은 ‘하얀 거짓말(white lie)’을 선의의 거짓말로 표현한다. 기색(氣色), 본색(本色), 생색(生色), 특색(特色), 정색(正色), 이색적(異色的)이라는 말도 색깔을 통한 정서를 보여준다. 조선의 선비들은 육체와 정신을 구분하여 남성을 양(陽)으로 여성을 음(陰)의 존재로 보았다. 따라서 육체적 본능을 천시하였는데, 여색(女色)을 밝힌다거나 주색잡기(酒色雜技), 곧 술과 여자와 노름에 빠져 패가망신한 사람을 천한 인간으로 여겼다. 반면 재색(才色)을 겸비한 미인과 같이 긍정적인 표현들도 동시에 존재한다. 푸른색에 관련하여 독야청청(獨也靑靑), 청춘(靑春), 청상과부(靑孀寡婦), 청출어람(靑出於藍), 청산유수(靑山流水)라는 말들은 색깔이 주는 상징이 문화의 경험을 통해 맺어진 정신의 표현임을 알 수 있다(이하 성기혁,『색의 인문학: 색으로 엿보는 문화와 심리산책』(교학사, 2016) 참조).
현재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과 같이 색을 보는 포유류는 원숭이 밖에 없다고 한다. 따라서 강아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빨강 옷을 입힌다거나 노랑 밥그릇을 준비하는 것은 주인의 만족이지 강아지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이제 색깔의 의미를 살펴보자.
자동차의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색은 노랑이다(따라서 위험을 알리는 경고등의 색이 노랑색). 유아나 어린이가 탑승하는 자동차를 노랑으로 정해 놓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인데, 노랑은 가장 밝게 느껴지고 어떤 환경에서도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색이기 때문이다.
진찰실에서 진료하는 의사들은 흰색 가운을 입지만 수술실에 들어갈 땐 초록색 수술복을 입는다. 수술복이 흰색이라면 옷에 묻은 선명한 피가 의사를 자극할 수 있다. 그러나 초록 수술복에 피가 묻으면 갈색으로 보인다. 초록은 빨강의 보색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초록은 피로를 회복하고 마음을 안정시킨다. 사실 눈의 피로와 마음의 피로를 풀어주는 초록은 자외선과 적외선의 중간에 위치해 있어 눈이 가장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색이기도 한다.
남(藍)색이라고 부르는 쪽빛은 파랑의 백미이다. 영원한 하늘의 색이고 그리움의 색이다. 동시에 쪽빛은 청결, 심원, 성실, 창조, 발전의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파랑은 지성과 연결된다. 형식보다는 내용을, 감성보다는 이성을 내세우는 색이기도 하다. 미국인의 이상이자 젊은 대통령의 상징인 케네디가 짙은 파랑 정장차림으로 대중 연설을 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다. 또한 첨단 기술을 내세우는 회사나 통신회사, 신용을 생명으로 여기는 은행들은 파랑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동시에 파랑은 식욕을 억제하는 색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색으로 요리한 음식을 돋보이게 만들어 준다. 음식의 배경색으로는 아주 좋은 색이 바로 파랑이다.
파랑의 심리적 반대색인 빨강은 자극적이고 활동적이며 의지력을 특징으로 삼는 색이다. 빛의 스펙트럼(빨주노초파남보)의 첫 번째에 위치하는 빨강은 애정과 흥분, 진취적 기상, 신체적인 힘, 강인함과 연결된다. 동시에 육체적인 사랑과 욕망도 빨강이 지닌 독특한 감성이라고 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빨강은 귀신을 물리치는 색으로도 최고라는 것이다. 동짓날 문설주에 팥죽을 뿌리거나 장을 담글 때 빨갛게 잘 익은 고추를 띄우는 것 또한 빨강의 적극인 에너지로 귀신을 물리치겠다는 생각이라 할 수 있다. 귀신은 어둡고 습하고, 죽음과 음기가 있는 곳을 좋아한다. 빨강은 양기가 왕성한 색으로 태양과 밝음을 상징한다. 따라서 남쪽을 뜻하는 양의 색인 빨강을 귀신이 싫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출애굽 당시 마지막 10번째 재앙인 장자 죽음에서 히브리 백성들을 구원해 준 것이 바로 어린양의 빨간 피가 아닌가!
회색은 빛의 강약에 의해서 생긴다. 어두움과 밝음의 중간에 서는 회색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성향을 보여준다. 단아하고 부드러운 이미지의 색이기도 하다. 따라서 불교에서 중생의 선한 마음을 해치는 가장 근본적인 3가지 번뇌를 독에 비유한 삼독(三毒), 곧 탐진치(貪瞋痴, ‘탐욕’과 ‘분노/노여움’과 ‘어리석음’)를 경계하기 위한 승려의 옷은 회색이다. 
여기서 깡통신학 셋!
색깔 신학은 예수님께 옷 한 벌 맞춰드린다. 노란 목도리에 회색 옷을 입혀드리고, 그 위를 파란색과 빨간색을 연결한 태극 모양의 겉옷을 걸친 패션인데, 서 계신 배경은 초록 들판이다. 이렇게 옷을 입으신 예수께서 거미와 더불어 매끄러운 곡선의 길을 가시며 우리들에게 따라오라고 말씀하신다.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 바로 색깔 목회가 아닐까?
최병학 목사2.JPG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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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19 : 깡통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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