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홍석진 목사.jpg
 “공문(空門)의 안뜰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깥뜰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수도도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살이의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어서, 중도 아니고 그렇다고 속중(俗衆)도 아니어서, 그냥 걸사(乞士)라거나 돌팔이중이라고 해야 할 것들 중의 어떤 것들은, 그 영봉을 구름에 머리 감기는 동녘 운산으로나, 사철 눈에 덮여 천년 동정스런 북녘 눈뫼로나, 미친 년 오줌 누듯 여덟 달간이나 비가 내리지만 겨울 또한 혹독한 법 없는 서녘 비골로도 찾아가지만, 별로 찌는 듯한 더위는 아니라도 갈증이 계속되며 그늘도 또한 없고 해가 떠 있어도 그렇게 눈부신 법 없는데다, 우계에는 안개비가 조금 오다 그친다는 남녘 유리(?里)로도 모인다.”(박상륭, 『죽음의 한 연구』, 1. 1 중에서)
  한국 조계종 소속 현각 스님의 발언이 화제입니다. 예일대 학부, 하버드 대학원의 스펙을 자랑하는 독일계 가톨릭 집안 출신의 미국인 폴 뮌젠(Paul Muenzen)은 숭산을 스승으로 1992년 한국에서 출가하여 ‘현각(玄覺)’이라는 법명을 받고 승려가 됩니다. 독특한 이력을 가진 벽안의 스님은 곧 장안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TV에 출연하는가 하면 그가 쓴 『만행(萬行)-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는 일약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25년간 한국 불교의 자랑같이 보였던 현각이 얼마 전(7.29) 충격적인 일갈(一喝)을 남겼습니다. “실망한 한국 불교와 인연을 끊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그가 제시한 이유는, 과도한 순응(hyper conformity) 문화로 대표되는 유교적 잔재, 여전히 만연한 인종 차별과 남녀 차별, 기복 신앙 등이었습니다. 결국 한 마디로 하자면 이렇습니다. “돈만 밝히는 한국 불교를 떠나겠다!”
  박상륭의 소설 속 유리(?里)는 구도자의 성명(姓名)인 동시에 구도의 성소(聖所)였습니다. 청소년기 절친의 죽음 앞에서 인생의 삶과 죽음의 비밀 앞에 고뇌하던, 그러나 공문의 안뜰도 바깥뜰도 아닌 곳에 서 있던 미국인 폴 뮌젠은, 또 한 사람의 유리가 되어 또 하나의 유리에 정착해서 구도의 길을 걷는 현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는 박상륭의 ‘유리’인 동시에 예수 사람으로서 ‘우리’의 자화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현각의 수행을 방해하고 결국 절연선언을 하게 만든-비록 바로 글을 내리고 연을 끊겠단 말은 와전된 것이라 번복했음에도-종교적 구습과 사회적 인습들은 어쩌면 한국 불교만이 아니라 한국 교회의 민낯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좀처럼 지워버릴 수 없습니다. 
  <시대를 바라보는 혜안에 역사적 통찰력과 무엇보다도 성경의 고갱이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굴종(屈從)과 교회에 대한 자기애(自己愛)에 의지하는 성도들, 혹은 백인에 대한 까닭 모를 동경과 유색 인종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이 은밀하게 자리 잡은 교회들, 교단 중앙에서부터 개(個) 교회에 이르기까지 너나 할 것 없이 만연한 돈봉투의 신화들, 생존을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 나라와 거룩한 주님의 뜻이 아니라 일신의 유희와 안락과 건강과 번영에 천착한 값싼 신앙들!>
  현각의 일갈이 있은 후, 불교계 안팎에서는 자성과 참회의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사람이 추구하는 진리의 세계에서도 여전히 회개의 목소리는 힘이 있습니다. 하물며 절대적인 진리요 유일한 길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세계에서야 두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한국 교회를 향한 일갈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일갈이 있기는 있으되, 한국 교회 전체를 정신 번쩍 들게 하는 영향력 있는 일갈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일갈이 가끔 있긴 있으되, 거룩한 도전(holy challenge) 앞에서 진정성 있는 반응(realistic response)을 찾아보기가 또한 어렵습니다. “회개하라!” 세례 요한의 외침이 문득 그리운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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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누구를 위한 일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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