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송시섭 교수.JPG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이란 영화가 생각난다. 몬태나 주의 깊은 계곡에서 플라이 피슁(fly fishing)을 즐기는 맥클레인(Maclean) 목사와 두 아들의 뒷모습이 애잔한 가족사에 얽혀 마음속에 깊은 울림을 준 영화였다. 그러나 그 영화의 또 다른 향기는 맥클레인 목사가 설교에 인용하는 아름다운 시(詩)들이었다. 설교의 깊이를 더 해주는 시인들의 목소리를 통해 빈들에서의 예수님의 외침이 더욱 절절히 가슴에 와 닿는 것을 경험했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교회는 시를 잃어버리고, 문학을 놓쳐버렸다. 경영학적으로 교회를 운영하고, 심리학적으로 상담하며, 공학적으로 교회를 리모델링하면서 원래 성경이 문학이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성경에 등장하는 역사는 사실 히브리민족의 구술문학이었으며, 시편, 잠언은 그 절정에 놓여 있었다. 만약 모세오경과 예언서들이 문학이 아니라면 어떻게 우리가 연대기를 넘어선 그 이상을 보게 되는지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비의(秘儀)를 담은 계시와 환상, 그리고 신비로운 묵시문학의 장르 속에서 선지자들의 외침은 메마른 구호가 아닌, 애끓는 감정의 토로로 변하였다. 예수님 역시 아름다운 문장을 읊으시던 음유시인이셨고, 손에 잡히는 비유를 그려내시는 화가셨다. 단테도, 셰익스피어도 성경에서 그 많은 영감을 길어내었다.
그러나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우린 딱딱한 구호를 교회 중앙에 붙이고 조직의 행동목표를 걸개로 내걸었다. 우리가 문학으로서의 성경을 뒤로하고 교본으로서의 성경만을 추구하는 동안 뜨겁게 흐르던 이야기들의 맥박은 희미해졌고, 미움과 사랑, 배신과 음모로 가득한 집안 분쟁은 구속사의 도식 뒤에 숨겨져 버렸다. 혼란을 일거에 해소하는 교리가 지배적인 성경해석이 되고 난 다음 우리가 얻은 것은 교회성장이었으나, 성경 자체를 돌고 돌아 부딪혀 오는 물보라를 놓치면서 우리들의 옷은 깔끔하고 두 발은 물에 젖지 않게 되었다. 현대인을 위해 쉽게 풀어 쓰인 성경은 운율을 잃고 설명문으로 변해버렸으며, 스토리와 내러티브가 빠져버린 설교는 주제와 소제목들로 구성된 프레젠테이션이 되어 버렸다. 대표기도는 틀에 박혀버렸고, 회의는 지루해졌다. 주일학교에서 문학적 상상력이 자취를 감추자 우리가 만나게 된 것은 세상의 춤과 오락프로그램의 흉내들뿐이었다.
고전은 다시 읽어도, 읽을 때마다 새로운 맛을 주는 책이다. 성경은 원래 그런 책이었다. 아니 고전을 넘어 경전이 되어 버린 성경은 비극과 희극을 통해 생명을 전달하는 문학의 결정판이다. 교회 뜰 안에 문학의 꽃을 다시 심자. 온 성도가 성경의 한 이야기를 리듬 있게 함께 읽는 멋진 저녁시간을 갖자. 기도를 멋진 미사여구로 꾸며 드리고, 설교를 그리스 비극처럼 관객에게 울부짖게 하자. 딱딱해져버린 마음의 밭을 먼저 문학의 쇠고랑으로 갈아엎자. 성령의 비가 흠뻑 내려 바닥까지 적실 수 있도록 시와 노래로 깊은 도랑을 만들자. 교회 안에서 토마스 아 켐피스와 마주 앉고, 파스칼을 불러오며, 톨스토이를 만나보자. 어른들을 위한 기독교문학캠프가 교회마당에 임하게 하자. 교회가 신령한 문예부흥의 근원지가 되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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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섭 교수] 문학을 잃어버린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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