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야훼 하느님께서는 ‘이제 이 사람이 우리들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으니,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먹고 끝없이 살게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시고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셨다. 그리고 땅에서 나왔으므로 땅을 갈아 농사를 짓게 하셨다. 이렇게 아담을 쫓아내신 다음 하느님은 동쪽에 거룹들을 세우시고 돌아가는 불칼을 장치하여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목을 지키게 하셨다.” (공동번역 창세기 3장 22-24절)
“그때는 우리는 새로운 창조주가 되어 우리가 만든 기계인 아담과 하와가 우리 인간들이 금지시킨 선악과를 베어 물고, 기계들의 에덴동산인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장면은 그리 어색하지 않다. 왜냐하면 오래 전 우리 인간은 창조주에 그렇게 도전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최병학, 『현대사상과 영화이야기』 중에서)
 
1. 알파고의 승리

 
문화1.jpg▲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
 
인공지능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바둑 대결에게 알파고가 가져간 승리는, 이제 우리 인간이 기계(와 더불어 인공지능)에 관하여 무시하거나 외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야 할 이웃(이 될지 해치는 이리가 될지?)임을 가르쳐준 사건이었다. 카이스트 김대식 교수가 <인간vs기계>(동아시아, 2016)에서 한 말처럼 “알파고의 승리는 어쩌면 그동안 경쟁자 없이 지구를 지배하던 호모 사피엔스의 시대가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지도 모른다.”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라고 말했던 마셜 맥루언(M. McLuhan)의 의수 이론(義手 理論)은 세련된 기술결정론(technological determinism)의 결정판이었다. “기술은 자율적으로 변화 한다”라는 기술결정론은 끝없이 다양해지는 욕망을 채워 주는 것을 미끼로 사람에게 계속 새로운 기술개발을 요구하고 있다. 동시에 “자율적으로 변하는 기술이 사람과 사회의 변화를 주도 한다”라는 말은 매체가 인간 존재 방식을 결정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기계를 사랑하라”는 세련된 기술결정론과 맥루언의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라는 명제는 기계의 바다 속에서 살아남기란 이러한 기계의 파도에 거슬러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파도 타는 법을 익히고 즐기는 것임을 뜻한다. 이제 바야흐로 인간 정체성의 문제는 “어떤 미디어와 결합되느냐?”가 된 것이다.
 
2. 혼종의 길?
탈육신(disembodiment)의 시대에 전통적인 존재는 더 이상 그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은 동물과 결합하거나, 기계, 나아가 네트워크와 결합하게 되는데, 이러한 혼종(hybrid)을 통해 존재를 확장하며, 존재의 새로운 터전으로 사이버스페이스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혼종의 운명은 1998년과 2002년 두 차례에 걸쳐 스스로 사이보그(Cyborg)가 되는 수술을 감행하여, 인류 최초로 사이보그가 된 케빈 워릭(K. Warwick)을 통해서 구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이보그(cyborg)는 1950년대 말 미국의 맨프레드 클라인즈(M. E. Clynes)가 만든 용어로, 인간과 기계간의 통신을 뜻하는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와 생물(organism)의 합성어이다. 아무튼 <나는 왜 사이보그가 되었는가>(김영사, 2004)에서 워릭은 미래사회에서는 기계가 인간보다 지능이 뛰어날 것이라고 주장하며 인간은 이러한 사회를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더 진보적으로 미래사회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한바 있다.
“날짜: 2050년 1월 1일. 지능적인 기계(intelligent machine), 아니면 로봇이 인간에게 지구를 물려받을 것이라 예견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그다지 정확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의 예측이 빗나갔음은 분명히 입증되어왔다. 지구는 사이보그가 지배하고 있다. 사이보그는 새롭게 개발된 컴퓨터 네트워크 제어장치의 슈퍼 지능을 가동한다. 인간과 기계가 결합되어 업그레이드된 형태의 그것은 그 자체의 목적을 위해 지능을 사용할 수 있다. 사이보그는 강력한 팔다리와 같이 직접적인 신체 조건의 개선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정신적 연계 방식 체계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들의 두뇌는 무선장치를 이용해 직접 중앙 컴퓨터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생각만으로 네트워크에 접속되고 지적 능력과 기억을 불러낼 수 있다. 반대로 중앙 네트워크는 정보를 얻거나 임무를 수행시키기 위해 개별 사이보그를 불러들인다. 이렇게 네트워크는 하나의 통합된 체계로 가동된다. 하나의 개별적인 사이보그가 네트워크의 무선 접속 없이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고, 개개의 사이보그가 없는 네트워크 또한 상대적으로 무력한 것이 된다.”
영화 <로보캅>이나 <아이언맨> 등에서처럼, 인간의 정체성이 기계와 결합되는 혼종을 통하여 새로운 인간이 탄생하고, 역으로 영화 <공각기동대, 攻殼機動隊>에서처럼, 정보가 신체성을 입어 인간 혹은 생물체가 되는 존재의 확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사실 로봇 공학 전문가인 미국의 한스 모라벡(H. Moravec)은 <마음의 자식들>(Mind Children, 1990)에서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는 이미 완료되었으며, 미래사회는 사람보다 수백 배 뛰어난 인공두뇌를 가진 로봇에 의하여 지배되는 후기 생물사회(post-biological)가 될 것이므로, 인류의 문화는 사람의 혈육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모두 넘겨받는 기계, 곧 ‘마음의 자식들’에 의하여 승계되고 발전될 것이라는 주장을 펼친바 있다. 역시 화제작 <로봇>(Robot, 2000)에서는 2050년 이후 지구의 주인이 인류에서 로봇으로 바뀐다는 대담한 논리를 전개한바 있다.
 
문화2.jpg▲ 영화 <터미네이터>의 한 장면
 
3. 21세기 초인과 사이버 주체
1990년대 말 이후 유럽의 인문학 논쟁을 이끌고 있는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는 배아복제를 비롯한 유전공학의 기술적 성취를 철학적 사유의 반석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그는 니체(F. W. Nietzsche)와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를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하버마스(J?rgen Habermas)와 대립하면서 독일 철학계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는가 하면, 나치즘(Nazism)과 잇닿은 궤변론자라는 악평도 받고 있다. 여러 면에서 ‘독일적’인 배경을 지닌 그의 사유는 21세기판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의 기획’이라 불린다.
그는 근대적 휴머니즘의 패러다임을 비판하며 ‘포스트 휴머니즘’(post-humanism)을 주창한다. 그에게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존엄성을 확보하기 위해 야만성과 투쟁해온 과정이다. 전통적 휴머니즘은 이를 위해 문자를 매개로 한 ‘길들이기’ 전략을 택했지만, ‘문자의 시대’가 끝나면서 이 방식은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었다. 이른바, 새로운 미디어 사회의 도래와 함께 인간의 공존이 새로운 토대 위에 서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인류는 ‘새로운 종류의 야만화’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는데, 그것은 “전쟁과 제국주의, 그리고 미디어를 통한 인간의 일상적 야수화”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슬로터다이크는 유전공학에 주목한다. 그에게 인문학적 교육이나 유전공학은 모두 ‘사육(길들임)’의 한 방식이며, 인간에 대한 인간의 간섭의 또 다른 얼굴이다.
이제 새로운 존재의 탄생, 혹은 인간성 창조는 현대 과학기술의 총아인 유전공학을 활용해야하며 바람직한 인간성의 기준을 설정하기 위해 철학자와 과학자의 연합이라는 ‘21세기판 초인’이 필요하게 된다.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한길사, 2004)은 말 그대로 ‘차라투스트라의 기획’으로, 자연의 과정인 선택적 탄생을 기술로 가속화하는 것이다. 영화 <가타카>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그 일례이다. 따라서 나치즘을 기억하는 현대인들은 슬로터다이크의 말을 단순히 시대착오적인 니체주의자의 궤변으로 간단히 일축하였지만, 그의 문제의식은 미국이 주도하는 21세기적 지구화에 대한 강력한 비판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그냥 넘길 수만도 없을 것이다.
동시에 생물학적 주체(Bio-I)에서 사이버 주체(Cyber-I)로 전환되어 가는 존재의 확장은 이제 디지털이 중심이 되는 존재인 ‘디지털 생물학’으로 넘어간다. 가령, 피터 벤틀리(P. Bentley)는『디지털 생물학』(김영사, 2003)에서 미래 디지털 기술이 생명의 특성을 모방함으로 기존의 모든 차원을 뛰어 넘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가령, 생물처럼 번식하고 다양하게 ‘개체변이’를 일으키는 소프트웨어가 가능할 것이다. 부여된 임무를 완수할 경우에는 생존하고 후손을 남기며, 실패할 경우에는 도태되게 함으로 소프트웨어 스스로 진화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벤틀리는 미래에 디지털 공학과 생물학이, 컴퓨터와 생물체가 매우 유사한 형태를 갖는 단계에 도달할 것으로 예측한다. 디지털 형태의 의미소(meme)가 자체 복제를 넘어 진화하기 시작할 경우, 궁극적으로 자연계에서 생명체가 거듭해온 진화의 형태와 흡사하게 될 것이라 보는 것이다.
 
4. 영혼 불멸? 인간 멸망?
 “크리스(주인공 로빈 윌리엄스) : 이게 진짜 나요?
 앨버트 교수 :  나란게 뭔데? 자네 신체?
 크리스 : 어쩌면…
 교수 : 그럼 신체가 없으면?
 크리스 : 그래도 나죠.
 교수 : 어째서?
 크리스 : 생각은 할 수 있으니까.
 교수 : 생각 역시 우리 몸의 일부인 뇌를 통해서 하는데?
 크리스 : 하지만… 생각이란 무형의 것으로 나를 존재하게 해 주죠.
 교수 : 바로 그거야. 존재에 대한 믿음. 그게 해답이야.
 크리스 : 세상에… 진짜야.
 교수 : 더 이상 아무 것도 필요 없어. 생각만 하면 돼. 생각이 현실이고, 몸이란 환상이야…. 아이러니컬하지 않아?”
로빈 윌리엄스 주연의 영화 <천국보다 아름다운>(1998)에 나오는 위 인용 대사는 플라톤의 관념론에 기초한 인간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 인간 존재란 몸은 삭제되고 정신만 있는 관념적 존재가 된다(물론 영화에서 이곳은 천국이지만). 몸의 구속을 받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를 확장해 나갈 수 있고, 현실의 불안과 한계를 극복하여 사멸하지 않는 세계를 찾아 나선 인간의 탐구 열정은 천국이 아닌 현실에서 천국의 모습을 창조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고대 플라톤의 이데아(idea)로부터 그 발생사적 연원을 찾을 수 있겠지만, 오늘날 사이버스페이스와 인공지능은 이러한 상황을 가능하게 하였다.
2012년부터 본격화한 딥러닝(deep learning) 이후의 인공지능은 전혀 차원이 달라졌다. 방대한 데이터(=빅데이터)를 그냥 집어넣어 주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축적된 자료를 분류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알파고와 같은 기계에 지능이 생긴 것이다. 김대식은 인공지능을 ‘약한 인공지능’과 ‘강한 인공지능’으로 구분하는데, 알파고나 무인 자동차(우리는 이 무인 자동차의 아담을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서 맛보았다)를 같은 인공지능이 약한 인공지능이라면, 영화 <터미네이터>의 터미네이터와 같은 독립성이 있고 자아가 있고 정신이 있고 자유의지가 있는 인공지능을 강한 인공지능으로 구분하며, “강한 인공지능은 인류를 파멸로 이끌 ‘재앙’이 될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인류보다 지적, 물적으로 우위를 점하게 될 강한 인공지능이 판단하기에 인간이란 종이 지구에 불필요하거나 해롭다면 인류의 멸종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대식의 경고이자, 대안이다.
“강한 인공지능이 어느 한 순간 인간을 놓고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인간은 지구에 왜 있어야 되나? … 만약에 제가 강한 인공지능이라면 ‘지구-인간’이 더 좋으냐, ‘지구+인간’이 더 좋으냐 하고 물어볼 거예요. 강한 인공지능 입장에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구-인간’이 더 좋다는 논리적인 결론을 충분히 낼 수가 있다라는 거예요. … 약한 인공지능은 100% 실현됩니다. 다시 말해, 내가 하는 일이 이미 기계 같다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가진 유일한 희망은 ‘우리는 기계와 다르다’입니다.”
영혼 불멸을 추구하는 인간이 그 ‘추구’의 욕심으로 인해 ‘멸망’당하는 것이다. 처음 창세기의 신은 우리를 추방했지만, 이제 우리가 만든 제2의 아담과 하와는 두 번째 창세기에서는 창세기의 이름을 던지고 요한계시록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멸망시킬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가 아니라) 확신하거나!
 
 
최병학 목사.JPG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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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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