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N)가정호 목사.JPG
  우울하다. 한두가지로 우울한 것이 아니다. 생각의 출발점마다 우울이 파고든다. 이 우울함을 이겨내는 힘이 어이없게도 쓰디쓴 커피에 한줌 집어넣어 마시는 설탕의 달달함 때문이 아닐까하고 스스로 의문한다. 내가 밉다. 문제의 본질이나 사태의 진실을 해결하려고 해도 어디서 부터 어떻게 해결할지 몰라 미봉책으로 머리를 흔들어 잊으려는 마약성 일상화가 두렵다. 상식이 무시되는 사회는 폭력사회이다. 불통사회로 인해 집단 우울이 누적되면 자살증가, 실종 증가율로 나타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는 중얼거림과 함께 무책임의 역습이 쓰나미처럼 몰려 올 미래를 걱정한다. 폭력적이지 않은 시대가 있었는가 반문해 보기도 한다. 창세이후 세상은 언제나 폭력적이었다. 전쟁의 반복, 국가폭력, 인종차별과 인종청소, 종교전쟁, 살인의... 반복, 강도상해의 반복... 그것은 국가도 그랬고 개인도 그랬다. 우리눈으로 보고 느끼고 확인하는 폭력은 빙산의 일각이다. 실제 지하에서 행해지고 있는 폭력과 살인, 강도, 속임, 착취, 거짓말 등등은 도도한 강물처럼 흐른다.
 폭력사회를 일신하고자 하는 노력은 지속적으로 증가되어 왔다. 선진국이라는 말도 나왔고, 근대화, 세계화라는 말들도 그런 동기로 유익하게 쓰여졌다. 실제로 세상은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사회를 만들어 낸 것일까? 세상이 좀 살기 좋아졌는가? 일부국가가 소비하는 물품이나 식탁은 풍요로워진 듯하다. 그러나 그 소비물품을 공급하기 위한 제3세계의 노동자들의 피해는 한층 더 더 증가하고 있다.
 가난은 증가하고 있다. 상대적 빈곤감에 시달린다. 청년들의 결혼은 늦춰지고 있다. 핵에너지 사용의 증가로 인한 피로도도 증폭되고 있다. 다문화 세계로 돌입한 이후 이슬람 포비아도 증가하고 있다. 경기침체로 인한 이유도 있겠지만 인공지능 롸봇으로 인한 일자리 상실도 만만치 않다. 식탁의 죽음도 공포중 하나이다. 유전자 변형식품이 식탁을 점령해간다. 국산 먹거리는 점점 설자리를 잃고 수입산 식품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방부제와 농약의 사용증가로 상세불명의 질병들이 증가한다. 자본주의 후기증상인 빈익빈 부익부로 인해 발생하는 시민생활격차로 인해 삶의 질과 행복지수는 점점 추락중이다.
 지구 ‘종말의 날 시계(Doomsday Clock)’는 자명종 가운데 제일 무섭다. 시카고대에 설치된 이 시계는 밤 12시 자정(子正)에 맞춰져 있다. 시계 바늘이 여기에 다다르면 ‘지구 최후의 날’이 온다. 물론 이 시계는 세계환경에 대한 경고를 알리는 시계이다. 그런데 이 시계 바늘이 2010년 1월14일을 기해 11시54분으로 멈춰서있다. 인류의 마지막이 어느 순간에 닥쳐올지 정확하게 예단하기는 어렵지만 12시 5분전이라는 표현은 적절해 보인다. 그만큼 세계시민 우울지수는 높아지고 있다. 전국민의 25%정도가 경미한 우울에서 중증 우울로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우리 사회가 점점 소통 단절로 치닫고 있다. 가정이나 교회나 국가나 기관이나 소통의 부재는 비극을 해산한다. 소통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피차 존경하는 마음으로 낮아짐이 없이는 결코 불가능하다. 폭력이나 무력은 소통과는 전혀 관계없는 악한 행위이다.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홍보나 광고, 힘의 우위를 이용한 설득은 폭력을 세련되게 행하는 것일 뿐 진정한 소통은 아니다. 고상하고 예술적인 소통은 아닐지라도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소통을 반드시 회복되어야 할터이다.
 출판되는 책이 증가하고, 종이 소비가 늘고, 포럼이나 세미나가 즐비하여도 대안이나 해결책이 없다. 매스컴은 세계적인 석학들이 다리를 꼬고 앉아 세련된 이론으로 미래를 진단하고 지속가능성을 추론하는 일로 24시간 연일 바쁘다. 그러나 해결책은 나오지 않는다. 국가폭력이 사라지지 않는다. 21세기 첨단세기에 백주대낮 길거리에서 종교적인 이유로 시민의 목을 참수한다. 동족을 종교적인 이유로 내쫓아 1000만의 난민이 발생하여 대양을 떠돌다가 젖먹이 아이를 바다에 빠뜨리는 이 우울한 사회, 아침에 타국이 내나라에 끼친 피해를 보상하라고 눈흘기고, 밤에 총칼로 다른 나라를 공격하는 제국들의 협박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 우울한 사회에서 교회의 역할은 무엇일까? 피로도가 증가하고 우울권하는 사회 심지어 마약권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낙관적인 삶을 살수 있을까? 쉽지 않다.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지않고는 결코 낙관을 가질수 없다. 어쩌면 낙관은 일종의 회피나 도피, 무책임을 포장한 심리적 자기속임이라고 비난받기 십상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아야 한다. 성경66권을 관통하는 종주권적 편무 언약을 확실하게 붙잡아야 한다. 언약을 놓치면 낙관도 유실된다. 창세기의 시작에서 부터 그리스도의 재림에 이르는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는 그 사랑에 사로잡히지 않고는 이 험한 시대를 맨정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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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호 목사] 우울한 시대 낙관하기 힘든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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