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8년 출생한 어네스트 홀은 프린스톤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린스톤신학교에서 공부한 엘리트 목사였다. 그는 1903년 9월 내한 했는데, 한국으로 오기 전인 1903년 7월 1일 그의 사촌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의 내한에 대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 자신의 아버지의 집인 미시간 주 칼라마주(Kalamazoo)에서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저는 8월 8일 태평양을 횡단하는 우편선인 시베리아호로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이곳 아버지 집에서 쉬게 될 것입니다. ... 저는 한국에 9월초에 도착하게 될 것이고, 즉시 평양에서 모이는 연례선교사대회에 참석할 것입니다. 그 후에 9월 늦게 부산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I am to sail from San Francisco on August 8th on ‘the Siberia’, pacific mail S.S.Co. Until then I am resting here at my father’s home. ... I shall arrive there early in September then at once to attend the annual missionary meeting at Pyungyang September 12th, and return to Fusan late in September). 실제로 홀은 9월 1일 부산에 도착했고 이때부터 한국선교사로 일하게 된다.
그에 대한 연구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유관자료의 결핍이다. 그러나 알려진 바로는 그는 부산에 도착하여 첫째, 언어공부를 시작하였다. 이것은 무든 선교사들에게 요구되는 의무였다. 둘째, 북장로교 윌리엄 베어드가 시작한 규범학교를 도우면서 학교교육을 강조하였다. 한국의 장래를 위해서는 교육이 선행되어야 하고 영어를 가르쳐야 서구사회와의 접촉과 교류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규범학교에서 봉사하면서 이 점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그가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Korea Mission Field에 두 편의 글을 기고했는데, 이 글에서도 한국사회에서 교육을 강조하였다. 셋째, 성경공부반을 조직하여 운영하였다. 한국어 공부에 주력하면서서 성경공부를 통해 개인 접촉을 시도하였다. 이 점이 어떤 결실을 가져왔는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의 사역에서 가장 어려운 난제는 자신의 건강이었다. 병명은 좌골신경통이었다. 근본적 문제는 척추인데, 척추문제가 왼쪽다리에 통증을 유발하여 더 이상 부산에 체류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일단 서울로 이적하였고, 서울에서 지내는 동안 만난 해릿 맥리어(Harriet McLear, 1872-1959)와 1905년 10월 언더우드 집에서 결혼했다. 결혼하고 아내의 도움을 받았으나 건강은 호전되지 못했고,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발전하여 결국 한국을 떠나게 된다.
비록 선교지를 떠났으나 한국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지내며 한국에서 더 오래 사역하지 못한 점을 아쉬워했다. 그래서 1910년 새문안교회가 새로운 예배당을 신축하게 되었을 때 강대상 비품 일체를 기증했다고 한다.
귀국 후 그가 한 가지 흥미로운 일은 이승만과의 접촉이었다. 조지 와싱턴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마친 이승만은 하바드대학에서 석사과정을 이수하던 중 1908년 뉴욕으로 갔고, 유니언 신학교 기숙사에서 지내던 중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 서울에서 만난 적이 있는 어네스트 홀 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전후 사정을 알게 된 홀은 이승만에게 자신이 공부한 프린스톤대학 대학원에서 공부하도록 권장하고 안내해 주었다. 그래서 이승만은 뉴저지 프린스톤으로 가 프린스톤대학교 대학원장 웨스트 박사를 만나 그의 도움으로 프린스톤에서 공부하게 되었고, 1910년 7월 18일 졸업식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얻게 된 것이다.
ⓒ 한국기독신문 & kcnp.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