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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586의 추억
2019/11/25 14:56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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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진 목사.jpg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한 정치인이 며칠 전 내년에 있을 총선 불출마선언을 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2000년에 만 34세의 나이로 16대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어느새 2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 저는 이제 처음 정치를 시작할 때 마음먹은 대로 제도권 정치를 떠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려 합니다.” 아직도 한참 때인데 어떤 연유에서 그랬을까요? 그 속내를 짐작할만한 발언이 비슷한 연배에 역시 여당의 3선 의원으로 활약하고 있는 분에 의해 나왔습니다. “약간 모욕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자리를 놓고 정치 기득권화 되어 있다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란 세간에서 말하는 이른바 ‘586 그룹’을 의미합니다. 50대의 나이, 80년대 학번, 60년대 생으로 학생운동권의 주역들이었던 그들이 어느새 기득권층으로 불리며 용퇴를 종용받는 시절이 오다니, 참으로 인생무상이요 화무십일홍이라는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80년대 인텔(Intel)은 개인용 컴퓨터로서는 획기적인 작품에 80286 번호를 붙여 시판합니다. 사람들은 그 끝자리 번호 세 자리를 따로 떼어서 별칭으로 부르기 시작했고, 곧 이어 80386 컴퓨터가 등장했습니다. 소위 286, 386 컴퓨터의 등장입니다. 그리고 갑자기 세상이 변했습니다. 대학에서는 컴퓨터로 수강신청을 받기 시작했고, 학과 사무실에는 어리둥절한 복학생들이 안면 있는 조교나 후배들에게 컴퓨터 작업을 부탁하는 진풍경이 벌어졌습니다. 전화기와 모뎀을 매개체로 당시 선구적인 청춘들은 ‘채팅’을 하면서 소통의 일대 혁신을 맛보았습니다. 3차원 테트리스를 멋들어지게 해내는 공대 친구는 일약 선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온라인 게임이라 할 수 있는 ‘삼국지’가 유행하면서 날밤을 새고는 토끼눈이 되어 수업 시간에 나타나는 학생들이 속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중반 386은 486으로 진화하고 곧 이어 펜티엄 컴퓨터가 출현합니다만 사람들은 관성적으로 이 제품마저 586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신세대들에게는 586마저 낯선 명칭입니다. 속도와 용량 면에서 격이 달랐지만 지금은 구시대 유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586 세대들처럼 말입니다. 독재정권에 저항하며 뜨거운 눈물과 불타는 가슴과 치솟는 핏방울을 개의치 않던 20대의 나이와 80년대 학번에 60년대 생들이었던 그들은 차츰 386이 되고 486이 되더니 어느 날 갑자기 586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 각 영역에서 한층 원숙해진 기량과 지혜로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려는 순간, 그 옛날 학과 사무실에 줄섰던 그때처럼 별안간 직면한 상황 앞에 엉거주춤 어쩔 줄 모르며 서 있는 형국입니다. 97그룹의 선두 주자로 불려도 손색이 없는 야당의 젊은 의원이 역시 불출마선언을 하면서 내뱉었던 일갈입니다. “정파 간 극단적 대립 구조 속에서 정치혐오증에 끊임없이 시달려 왔습니다. 지금 계시는 분들 중 인품에서나 실력에서 존경스러운 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대의를 위해서 우리 모두 물러나야 합니다.”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에 노트북이 나타나고 아이패드가 등장하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숫자들을 거론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286시절을 잊지 않는 586들이 존재합니다. 먼저 떠난 이들의 이름과 남겨진 자들의 슬픔도 차츰 희미한 기억이 되어가고 있지만, 그래도 처음 가졌던 순수와 열정과 희망만은 변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저의 가슴에는 항상 같은 꿈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한반도 평화와 남북의 공동번영, 제겐 꿈이자 소명인 그 일을 이제는 민간 영역에서 펼쳐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제 인생에 가장 소중한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나누고 싶습니다. 50 중반의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게 두렵기도 합니다. 하지만 두려움을 설레임으로 바꾸며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향해 뛰어 가겠습니다. 감사한 마음만 가득합니다.”(불출마선언 중에서) 소명과 도전과 설렘과 감사라, 어쩌면 우리들에게 더 잘 어울리는 단어들이 아닙니까? 다시 한 번 일어납시다, 586 그리스도인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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