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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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1919년 3월 11일 저녁 8시경 부산 최초의 독립 만세시위가 부산진 일신여학교 교사 2명과 11명의 학생들에 의해 시작된 역사적 사실의 기록물이 전시된 현 좌천동 소재 통합 부산노회 회관 바로 옆과 마주 건너편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120년의 역사를 지닌 부산진교회가 기독교 성지마냥 부산 교계의 자랑거리로 삼고 있다.
필자는 그 당시 기독 남성들은 왜 잠잠한 채 구경꾼으로 남고 어린 여학생들이 겁도 없이 시위에 나설 수 있었던 정신은 어디에서 났을까 하고 의문이 있어 다시한번 일신여학교 문화재로 관리 전시 된 내부 기록물을 직접 눈으로 보고 기록들을 훑어보았다.
100년 전만 해도 부산에 교회가 5개 교회 미만이었고 교인은 미약하여 더구나 교회 다닌다고 해도 교회안의 여성들은 잠잠하여야 되는 교회 분위기에 억눌려 있던 기독여학생들은 용감하게도 과감히 나라의 독립을 그토록 염원하며 기도했던 그 용기는 어디에서 났을까?
7회 졸업생 김반수 학생은 이렇게 증언했다. “3월 1일에 독립만세를 전국에서 부른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여 때는 이 때다 싶어 동료 일신 여학생 몇 명이 모여 태극기를 만들어 나눠 주기로 약속하고 반수학생은 어머니가 출가할 때 쓰려고 장만해 두었던 혼숫감 옥양목을 어머니 몰래 끄집어내어 기숙사로 가져와서 밤 열시가 되자 창문을 이불로 가리고 대접을 엎어서 동그라미를 그리고 붉은 물감 검은 물로 칠하여 태극기 50여장을 만들어 3월 11일 밤 8시경 거리로 가지고 가서 가는 사람 오는 사람에게 나눠 주고는 목이 터지도록 대한독립만세 불렀답니다. 부르다가 쓰러지면 일어나서 또 부르고 지쳐 쓰러지면 또 용기가 나서 불렀답니다, 그때는 여자로서 부끄럽다거나 무섭다기보다는 우리나라를 되찾아야지 하는 일념 때문에 일본경찰에 발가벗기 수모를 당해 가면서도 주모자는 학생 모두이지 선생님은 아니라고 단결된 모습을 보인 것도 성경에서 배운 신앙의 힘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니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여성이었지만 정말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도대체 그 불구의 용기는 어디서 났고 그 당시 교회 안에서나 밖에 가지도 여성들 특히 기독 여성들 존재가치는 남여 평등 사상은 고취하고 배웠으나 일반적인 여성에 대한 편견과 억눌림은 남자들보다 훨씬 소외되고 거부되어 왔다.
그런데 민족의 독립을 되찾아야만 언어도 이름도 창시개명으로부터 자유로운 길은 오로지 나라를 독립시키는 길만이 유일하다는 인식을 배운 것이 바로 기독 여성들이 평소 구약 출애굽과 느헤미야의 성경 속에 기록된 성전 재건과 애굽 노예생활 70년으로부터 출애굽 해방 정신을 성경에서 배워왔던 그 신앙과 사상이 가냘픈 기독 여성에게 가슴속 깊이 각인되고 배워온 그 시대적 정신의 발로가 이들로부터 깨어 일어나게 했다는 것을 실감할 수가 있었다. 그 당시 일신여학교 한국인 교사 박시연과 주경애 선생에 의해 가르침을 배운 대로 실천해 옮겼다는 6개월간 옥고를 치루고 난 김응수, 송명진, 김순이, 박정수, 김반수, 심순이, 김봉애, 이명시 등 학생 주동 인물들이 훗날 회고하면서 들려주었던 당시의 상황의 배경을 이야기해 준 고백이었다.
물론 당시의 시위 주동 인사는 한국여성이 아니고 일신여학교 교장인 데이비스 양의 선동과 묵인이 없었더라면 가능했겠는가?
학교는 교장이 전적인 최종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 교장의 양해아래 진행된 것이 한국인 선생 주경애였다.
부산의 최초 3.1운동의 시위는 제일 먼저 부산진교회 기독교인이었고 시발점이 일신여학교 학생과 교사들이 중심이 되었다. 그러니까 128년의 역사를 지닌 부산진교회는 부산교계 어머니 교회답게 여성 기독인을 정말 야무지게 양성하며 민족의식을 심어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허구 많은 기독 남성들은 왜 그토록 침묵내지 잠잠했을까?
남성 선호사상이 지배하였고 점잖게 양반 사상이 물들었던 교회 안에서 마저도 억눌린 저항 정신이 기독 여성만큼 덜 느꼈을 것으로 사료된다.
기독여성들 그 어린나이에 감히 남자도 못해내는 그런 용감한 행동은 사회 밑바탕에서도 소외되어 왔던 기생까지도 만세 시위에도 참가하였고 교회 안에서나 사회 저변에서까지도 기를 펴지도 못한 기독 여성들의 가감한 용기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에스더의 불굴의 구국 정신의 모델이 아니겠는가? 박순천 여사(5회 졸업생, 민주당 총재), 양한나 여사(1회 졸업생, 수도여자경찰서 사장) 등 거물급 여성들이 배출된 곳이 일신여학교다.
이제 100년이 지난 동구 좌천동 부산진 일신여학교 교사는 겉으로는 붉은 벽돌에 쌓여 있지만 내부 안은 위대한 3.1독립만세를 외쳤던 옥고를 치루었던 여학생의 사진은 빛바램 모양 장식장에 갇혀있는 주변은 아직까지 너무 초라하고, 부산시나 관할권인 동구청에 조차도 한푼도 문화재 관리 비용이 없이 덩그러니 교사와 사진만 100년이 지난 오늘날의 산증인으로 역사를 지켜 주고 있다.
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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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독립운동' 부산 기독 여성들보다 기독 남성들이 부끄러워 해야 하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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