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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 부산일신학교에서의 만세운동1
2019/02/20 11:18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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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만세시위가 서울 파고다 공원과 태화관, 그리고 전국의 9개 지역에서 동시에 일어났는데, 이 만세운동이 곧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부산에 이 소식이 전파된 것은 3월 2일 혹은 3일로 알려져 있다. 서울에서 배포된 독립선언서가 비밀리 지방으로 전해졌고, 고종의 장례에 참여했던 이들의 귀향과 함께 서울에서의 만세사건이 전파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경성학생단 대표가 부산으로 와 부산공립상업학교(현 개성고)와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교) 대표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면서 만세사건은 암암리에 부산지방으로 전파된 것이다.
이런 가운데서 부산에서 최초로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 부산시 동구 좌천동의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였다. 일신여학교 교사 주경애(朱慶愛)는 학생들을 시켜 비밀리에 부산상업학교 학생들과 연락을 취하고 한편으로는 일신여학교 동료교사들을 규합하여 일신여학교에서도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조용하고 이를 고등과 학생들에게 알려주었다. 일신여학교 3학년 학생 이명시(李明施)는 만세운동 정보의 전달자였다. 그는 교장인 마가렛 데이비스(大瑪嘉禮)의 수양딸이었다. 이에 3월 10일 월요일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온 학생 11명은 이불로 창문을 가린 후 태극기 100여개(일본측 기록에는 50매)를 제작했다. 당시 일신여학교는 원거리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15명 정도가 기숙하고 있었고 그 관리자가 호주선교사 멘지스(閔志使)였다. 이때의 태극기 제작에 참여했던 김반수는 후일 이렇게 증언했다. “10일 밤 10시 경 독립운동에 대한 벅찬 감격에 가슴 두근거리며 주경애 선생 기숙사 방에 모였다. 경찰의 눈을 속이기 위해 전깃불을 끄고 이불로 창을 가리고 교대로 망을 보며 촛불을 밝혀두고 태극기를 만들었다. 태극기를 만든 옷감은 내 혼수용으로 부모가 준비해 두었던 옥양목 한필이었으나 부족하여 마을 포목점에서 구입하여 마련했다. 태극의 원은 사발을 뒤집어서 그리고, 깃대는 학교 주변 대나무 밭에서 구해 100여개의 태극기를 준비했다.”
실제로 학생들은 치마를 찢어 태극기를 만들고 저고리를 뜯어 작은 수기(手旗)를 만들었다. 그리고 기숙사 옆의 작은 우물가의 담뱃대감으로 알맞은 세죽(細竹)을 꺾어 태극기 깃대를 만들었다.
3월 11일 새벽에는 좌천동의 일신학교 기숙사 주변에 궐기를 종용하는 격문이 뿌려졌다. 이날 아침 기숙사에서 거주하던 학생 김응수는 교실 청소를 하러 가던 중 이 격문을 발견하여 주경애 선생에게 보고하였다. 주경애 교사는 부산에서도 만세운동을 하라는 통보이고, 저녁 9시에 부산상업학교 학생들과 만세를 부르기로 했다고 알려주면서 비밀을 지키라고 지시했다. 그날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 온 고등과 학생 11명은 저녁 식사를 한 후 저녁 9시 경 교사 주경애와 박시연(朴時淵)과 더불어 전날 준비한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기숙사 문을 나와 좌천동 거리를 누비며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 때 교장인 마가렛 데이비스와 여교사 데이지 호킹(許大是)도 동참하여 만세를 불렀다. 주변의 주민들도 호응하여 학생들과 시위 군중은 곧 백여 명으로 늘어났다. 3,4백명의 군중이 집합하였다는 기록도 있으나 분명하게 알 수는 없다. 시위 군중은 초량 쪽으로 가려다 부산진 주제소에서 출두한 순사에 밀려 반대편 범일동 방향으로 가려 했으나 이 때 일본군경들이 대거 출동하여 시위를 저지함으로 시위는 더 이상 확대되지 못했다. 이 시위로 교장인 마가렛 데이비스와 선교사 교사인 데이지 호킹, 선교부의 장금이(Keemy), 그리고 주경애, 박시연 두 교사와 학생 등 40여명이 체포되었다. 주재소에서는 이들을 분산 감금했다. 그러나 두 선교사와 장금이는 곧 석방되고 두 교사와 주동 학생 11명이 심문을 받고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그들이 김반수, 김복선, 김봉애, 김란출, 김순의, 김신복, 김응수, 박정수, 송명진, 심순의, 이명시 등이었다.
이때의 시위가 부산지방에서의 첫 만세시위였고 이 지방 만세운동의 시발점이 되었고 향후 경남지방으로 확산되었다. 부산 경찰서 형사들은 일신여학교 기숙사를 수색하고 헛간의 등겨 속에 묻어 두었다가 미처 처리하지 못한 남은 태극기와 태극기 제작에 사용되었던 물감과 필묵(筆墨) 등을 압수해 갔다. 이것이 후일 재판에서 증거품으로 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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