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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 찰스 어빈 의사(4)
2018/11/12 15:21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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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방문하여 감동을 받은 베일리는 한국의 나병 시설을 위해 더 많은 재정적 후원을 보냈다. 실제적으로 수용시설에 들어오기 이전에는 거의가 예수를 믿지 않았으나 이곳에서 지내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한 사랑과 자애를 경험하고 기독교로 개종하여 가족으로부터는 버림 받았으나 복음 안에 인간 대접을 받고 감사하고 이런 병을 앓지 않았다면 예수를 알지 못하고 살았을 것이라고 도리어 질병으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것을 감사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맥켄지가 책임을 맡은 후 첫 세례식은 1912년 거행되었는데, 7명의 여자와 3명의 남자가 세례를 받았고, 1917년 무렵에는 성찬식에 참여하는 인구가 66명에 이르렀다. 1921년 초 상애원에는 111명의 세례교인과 40여명의 학습교인이 있었고, 10년 후인 1931년에는 234명의 세례교인이 있었다. 상애원의 교회에서는 1926년부터 전도자를 채용하여 경남동부 지역을 순회하며 개척 전도하게 했는데 그가 바로 손양원 전도사였다. 26년간 일했던 노블 맥켄지가 은퇴하고 1938년 2월 18일 부산을 떠나게 되자 호주 장로교의 마틴 트루딩거 목사가 책임을 맡아 병원을 운영했으나, 상애원은 1940년 군용지역으로 수용되어 결국 폐쇄되었고, 환자 중 300여명은 1916년에 설립된 소록도로 이송되었다.
부산의 나병원에 이어 광주에서는 미국남장로교 선교부의 윌슨 의사(DrR. M. Willson)에 의해 두 번째 한센병자 보호소가 설립되는데, 1910년 말 윌슨 의사는 나병선교회 베일리에게 광주에도 나환자 수용소를 짓도록 재정 지원을 요청하였고, 이 후원으로 1912년 11월 15일 광주군 효천면 봉선리에 나병환자 전용 병원을 건립하게 되었다. 이곳의 땅은 포사이드의 조사였던 최흥종이 헌납한 곳이었다. 첫 입원 환자는 22명이었다. 이 작은 시작이 윌슨에 의해 광주 나병원으로 발전하였고, 오늘의 여수 애양원으로 존속하고 있다.
후에는 대구에서도 1913년 나병원이 세워지게 되는데, 처음에는 ‘대구문동병원’ 혹은 ‘대구나병원’, ‘대구나환자병원’으로 불리다가 1924년부터 애락원으로 개칭되었다. 이 병원은 1909년 내한하여 1910년 대구 제중원(현 동산병원) 원장이 된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플레처(Dr A.G. Fletcher, 별리추)가 대구 부임 직후 남성정(南城町) 제중원 근처에 초가집을 한 채를 마련하고 1913년 3월부터 한센환자 20여 명을 수용한 것에서 출발했다. 플레처는 1913년 12월 구라선교회의 베일리 부부가 부산 나병원을 거쳐 대구를 방문했을 때 병원건립을 위한 지원을 요청했고, 플레처 원장은 1914년 베일리가 보내 온 건축기금 5천 달러로 1915년 달성군 달서면(현 대구시 서구) 내당동에 1만 8천여 평 부지를 확보하고 1916년 1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벽돌 건물을 짓고, 1917년 1월부터 환자를 수용하여 치료하는 병원을 개설했다. 이 보호소가 ‘애락원’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나병원의 건립과 선교에 큰 도움을 준 구라(救癩)선교회는 1874년 아일랜드(영국) 더블린에서 웰레스리 베일리(Wellesley C.Bailey, 1846-1937)에 의해 Mission to Lepers in India and the East 라는 이름으로 창립되었다. 그는 인도에서 나병으로 고통당하는 이들을 목격하고 이들에게 기독교적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이 선교회를 조직했는데, 한국의 3개 처에 나병 시설을 건립하도록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이 선교회가 Without the Camp라는 계간지를 발간했다. 베일리는 이 사역의 모금을 위해 동서양을 여행했는데, 1892년에는 미국과 캐나다를 방문하고 후원을 요청했다. 1893년에는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선교협회(World Congress of Missions) 연사로 초대받는 등 한센병자 선교의 전문가로 활동했다. 1906년에는 아시아 지역을 순방하며 이 사역을 홍보하였고, 특히 1913년 베일리는 부인 엘리스와 함께 중국, 뉴질랜드, 호주, 필리핀, 일본을 거쳐 그해 11월에는 한국을 방문하였고, 그 후 중국, 말레시아, 싱가폴을 거쳐 인도로 돌아갔다. 이 기간 동안 베일리는 150여 회 강연하며 여러 정부 관료들을 만나고 한센병자시설을 방문하고 도움을 주었다. 이런 활동으로 나병 선교회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베일리는 50여 년 간 나병 선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71세가 되던 1917년 은퇴했다. 그가 은퇴할 당시 나병선교회는 인도 중국 일본 한국 등 12개국에서 87개의 보호소(Asylums)를 건립하고 1만4천명의 나병환자들을 보호하고 도움을 주고 있었다. 그가 은퇴한 후 나병선교회는 그간 선교부 총무로 일했던 앤더슨(W.H. P. Anderson)이 대표직을 계승했다. 베일리는 1937년 91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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