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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 찰스 어빈 의사(3)
2018/10/29 14:37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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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빈의 나환자 보호시설의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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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부산 지방에서 북장로교 및 호주선교부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나병환자들을 위한 의료 사역의 시작이었다. ‘천형병’(天刑病)이라고 불릴 만큼 나병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당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병이었다. 환자들은 사회적 멸시와 천대를 받았고 심지어는 가족들로부터도 버림받고 유랑하거나 외딴곳에서 살 수 밖에 없었고 일반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필요한 의료 혜택을 누릴 수 없었고, 적절한 치료나 보호 없이 방치되고 있었으므로 이들이 당하는 육체적, 정신적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아픔을 안고 절망 속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복음과 일용할 양식, 그리고 가능한 의료적 혜택을 베푸는 일은 실로 기독교 신앙 아래서만 가능한 거룩한 사역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미 1904년 어빈과 빈톤 의사(Dr. C. C. Vinton), 스미스(Dr. W. E. Smith, 沈益順) 등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나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위한 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나환자를 위한 사역을 준비하였다고 한다. 그후 시더보탐(史保淡)이 이 일에 협력하였고, 어빈은 1908년 1월 나병선교회의 베일리 대표에게 나병 환자들을 위한 보호병원 건립을 위한 재정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 결과 재정 지원을 받게 되어 부지와 건물, 그리고 관리비를 지원받게 되었다. 그 기금으로 1909년 부산의 한적한 감만동 지역의 땅을 확보하고 우선 12명을 수용하였고, 또 그곳에 40명의 남녀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건물(Leper Asylum)을 1909년 11월 건립하였다. 공식적인 개원은 1910년 5월이었다. 가장 심한 환자순으로 입주 환자를 수용했는데, 1910년 11월까지 34명이 입주했다. 이곳이 부산시 감만동 성창기업 맞은편, 구 부산외국어대학 맞은편 지금의 부산시 감만동의 이마트 자리였다. ‘부산나병원’이라고도 불린 이 한센환자 보호소를 관장하는 일은 호주 선교부로 이관되었고, 일정기간 엥겔이 책임을 맡았으나 1910년 2월 21일 내한한 노블 메켄지 선교사가 1912년 5월부터 이 일에 책임을 맡게 되었다. 이 병원 혹은 보호시설이 매켄지가 원장으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상애원(相愛園)으로 불리게 된다.
나환자 선교회는 부지와 건축비용 등 운영전반의 경비를 제공하되 현지 선교사들이 관리와 행정 등 운영을 책임지도록 하는 정책을 지향했는데, 부산에서 이 일은 북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추진되고 병원이 설립되어 어빈 의사가 책임을 맡았으나 북장로교 선교부 내의 문제, 특히 어빈 의사의 가정사로 그가 1911년 사임하게 되자 북장로교 선교부는 이 보호소의 운영을 호주선교부에 위임하였고, 결국 1912년 5월부터는 노블 매켄지가 이 수용소의 원장이 되어 이 일을 전담하게 된 것이다. 메켄지가 원장으로 취임할 당시는 환자 수는 54명에 불과했으나, 그 수는 급속히 증가되어 1914년에는 80명, 1916년 당시는 150여명, 1921년에는 180명, 1922년에는 208명, 1924년에는 363명으로 증가하였고, 1930년대는 580여명, 1937년에는 600명에 달했다. 1934년 당시 전국적으로 2만 여 명의 한센병 환자가 있었는데 경남지역에 7천명의 환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부산 상애원에 나병선교회의 베일리 회장 일행이 방문했는데, 이때가 1913년 11월이었다. 베일리 회장 부부는 선교회 총무였던 앤더슨(W. H. P. Anderson) 부부와 함께 부산 감만동의 상애원을 방문하고 아래와 같은 기록을 남겨주고 있다.
“우리는 작은 항만 건너편에 있는 나환자의 집을 볼 수 있었다. 배를 타고 약 45분 소요되어 우리는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반쯤 갔을 때 선상에 있는 우리 일행을 보고 환영하기 위해 언덕에서 내려오는 환자들을 보았고, 우리들은 먼저 관리인과 그의 두 아들을 만났다. 이 관리인은 깊은 경의로 우리를 맞이하였고, 두 아들은 손을 이마에 올리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몇 번이고 절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첫 남자 나병 환자 집단을 만났는데, 그들은 우리를 환영하는 찬송가를 불렀다. 대부분의 입주 환자들은 힌색의 한복을 입고 있었다.
우리들은 잠시 건물들을 둘러보고 아담하게 보이는 구내 교회에 도착해 보니 남자들은 정면을 향해 왼쪽에, 여자들은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남녀석 사이에는 한국의 관습을 따라 휘장으로 구분해 두었다. 예배가 시작되고 찬송가 기도가 끝난 후 나는 그들에게 설교했는데, 통역은 윈(Winn) 선교사가 담당했다. 찬송을 부를 때 어린 소년은 노인이 찬송가의 구절을 따라 부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이 집에 살고 있는 여자와 아이들은 글 읽기를 열심히 배우고 있었다. 이곳에는 돌보아주지 못하고 방관할 수밖에 없는 환자들이 대문 밖에 많이 있었다. 정말 동같이 차가운 심장이라 할지라도 눈물을 흘릴 지경이었다. 나는 이보다 더 나쁜 상황을 본 적이 없었다. 이곳에는 방이 모자라 받아 줄 수 없는 입주 희망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정말 슬픈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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