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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 부산에 온 첫 의료선교사 휴 브라운(3)
2018/09/10 15:10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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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브라운은 자신의 병이 위중하여 1894년 1월 8일 부산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고, 부인 패니는 딸 아그네스가 여행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부산을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 그래도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여행하기 어려웠음으로 한국인 보모 한사람이 동행했다. 미국에 간 첫 유학생 윤치호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가 1888년 9월이었는데 1894년 봄에 부산의 한 여성이 미국으로 간 일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 여인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본국으로 돌아간 패니는 캘리포니아로 돌아가 요양 중인 휴와 재회하여 일정 기간 체류한 후 휴의 건강이 더 심해지자 뉴욕 덴빌의 잭슨요양원으로 갔다. 그곳은 패니의 삼촌 부부 재임스 잭슨(Dr James Jackson, Dr Kate Jackson)이 일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휴 브라운은 1896년 1월 6일 사망했다. 부산을 떠난지 2년 된 때였고, 29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덴빌(Danville)에 묻혔다.
남편이 사망하자 패니는 두 아이를 데리고 친정 아버지가 의사로 있는 뉴욕 캐스타일(Castile)의 North Water Gap에 있는 요양원(Water Gap Sanitorium)으로 갔다. 여기서 아버지를 돕는 보좌 의사로 일하게 된다. 그런데 아버지는 나이가 많아 1913년 사망했고 패니가 아버지 일을 대신하게 된다. 그러다가 1916년에는 뉴욕 캐스타일에 있는 요양원 의사로 가서 1940년 6월 30일부로 은퇴하기까지 25년간 일했다. 이곳에서 일하는 기간인 1926년 전후 몇 년간은 피셔 의사(Dr Fisher)와 함께 뉴욕의 엘리미라(Elmira)의 Gleason Health Resort에서 지내기도 했으나 캐스타일에서 의사로 오랜 기간 봉사했다. 1940년 73세의 나이로 현역에서 은퇴한 패니는 아버지가 설립했던 델라웨어 워터 갑(Delaware Water Gap)의 요양원으로 돌아가 지내던 중 1945년 1월 24일 펜실바니아 주 미니슁크 힐스(Minisink Hills)에서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은 거주하던 곳에서 가까운 Hauserville 그도 남편이 묻힌 뉴욕의 덴스빌에 묻혔다.
패니는 한국을 떠나 이후에도 일생동안 복음전도 혹은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살았다. 그가 캐스타일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한편 영국교회 선교회(CMS) 혹은 요양원선교회(Sanitarium Missionary Society) 혹은 여성절제회(프렌체스 윌야드 여성절제회)에 깊이 관여했다. 또 지역교회의 성경학교 교사로 봉사했다. 그 외에도 Eastern Star라는 단체의 회원으로, Wyoming Community의료협회, 뉴욕주 의사협회, 미국의사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패니는 지역사회 문제에 관여하고 좋은 봉사자로 활동했다. 또 미시간대학 의과대학 동창회 모임에도 참여하였기에 그에 관한 문서가 남아 있게 되었고, 동창회 사망자 파일(Necrology file)이 약 70년이 지난 필자에게까지 소개된 것이다. 패니의 일생은 베푸는 삶이었고, 이웃을 위한 섬김의 삶이었다. 그는 고상한 여성이었고 열정적인 크리스챤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슬하의 남매는 어떻게 되었을까? 패니가 사망할 당시 아들 도널드는 군 복무 중이었고 East Stroudsbury에 살고 있었다. 딸 아그네스(Agenes Lyon Brown)는 부모를 이어 의사가 되었고 켄터키주에 살았는데, 그도 부모를 따라 선교사역에도 동참했다. 1947년 4월 초에는 18개월 간 봉사하기로 하고 유엔국제부흥기구(UNRRA: United Nations Relief and Rehabilitation Administration)에 자원하여 중국에서 일했다. 이 단체는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복구하는 광범위한 사회복지계획을 수행하기 위하여 44개국의 합의로 1943년 설립되었는데, 주요업무는 식량·의류·연료·거주지·의약품과 같은 구제물자의 배급, 전문요원에 의한 구제사업, 농업·경제 부흥원조였고 난민들의 보호와 본국송환을 위해 수용소·인력·식량 등을 제공하기도 했다. 1945년에는 유엔기구가 되었다. 아그네스 의사는 와싱톤에서 훈련을 마치고 중국에 가 일했으나 UNRRA활동이 1947년에 거의 정지되었기 때문에 그가 중국에 오래 체류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뉴욕의 로체스터 병원에서 17년간 일했고, 1938년 6월에는 뉴욕 뉴브른스윅의 라트거스대학(Rutgers College)에서 여성의료분과 책임자로 일하면서 대학에서 건강관리업무를 수행했다. 대동아전쟁 기간 중에 3년은 켄터키주에 거주하며 미국보건성(US Dep. of Health)에서 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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