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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 부산에 온 첫 의료선교사 휴 브라운(2)
2018/08/27 13:30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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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휴 브라운의 부인 패니 허드(Fannie Burton Hurd, 1867-1945)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그 역시 의사이자 북장로교 선교사였는데, 1867년 10월 23일 의사였던 윌슨 허드(F. Wilson Hurd, ?-1913)와 어머니 한나 존슨(Hannah Johnson)의 둘째 딸로 뉴욕 덴스빌(Dansville)에 있는 잭슨 의원(Jackson Sanitorium)에서 출생했다. 아버지가 의사로 일하는 병원이었다. 첫딸은 안나(Anna)였다. 패니가 출생한 후 얼마 안 되어 펜실바니아주 이스트 스트로우즈버리(East Stroudsburg)에서 3마일(4.8 km) 거리의 작은 동네(Delaware Water Gap)에 새로운 의원을 설립했다. 패니는 이곳에서 성장했고 후에는 오하이오주의 오벌린대학(Oberlin College)에 입학했다. 1833년 설립된 오벌린대학은 미국에서 최초로 여성 및 흑인 학생의 입학을 허락한, 가장 오래된 남녀공학대학이었다. 찰스 피니가 이 대학의 제2대 학장으로 일한 기간이 1851년부터 1866년이었다. 오벌린에서 수학한 패니는 1888년 10월 미시간대학교 의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아버지가 의사였으로 의료인의 길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같이 입학한 동료 델핀 한나(Delphine Hannah)는 후일 어벌린대학의 유명 인사가 되었고 50여년간 교수로 활동했다. 패니는 같이 입학한 여학생 엘리자베스 뉴콤(E. Newcomb), 델라 피어스(Dellaa P Pierce)와 같이 앤 아바에서 같이 생활 했는데 이들은 후일 다 의사가 된다. 이곳 의학과에서 3년간 수학한 패니는 의사면허(MD)를 받고 1891년 졸업했다. 그 동료가 바로 휴 브라운이었다. 휴 브라운과는 같이 입학하여 같이 졸업한 동료였는데 졸업한 이들은 결혼하였고, 선교사를 자원하여 한국으로 오게 된 것이다. 이들이 선교사의 길을 가게된 것은 휴 브라운의 가족사와 관련이 있다. 휴 브라운의 누나인 메리 브라운(Dr Mary Brown)은 휴보다 앞서 1889년 미시간의대를 졸업하고 중국선교사로 일했는데, 메리는 루이스 싱클레어 헤드랜드와 같이 언어를 공부했고, 가르쳤던 인물이다. 이 무렵 코넬대학의 학생이었던 존 모트(John Mott)와 로버트 슈피어(Robert Speer)는 대학을 순방하며 선교동원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특히 의대를 순방하여 선교 열정을 고취시켰다. 이런 영향 하에서 휴와 패니는 한국선교를 자원하게 된 것이다.
이들이 한국 선교사로 갈 때 디트로이트장로교선교회(Detroit Presbyterian Missionary society)의 후원을 받았다. 이들은 1891년 12월 8일 한국에 도착했고, 자기 집에 시약소를 설치하고 의료 사역을 시작했다. 첫 조수가 고학윤이었다. 이들은 디트로이트장로교선교회의 후원으로 한국에서 집도 짓고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한국에서 남매를 출산했는데, 첫 아이가 도널드(Donald)였고 둘째가 아그네스(Agnes)였다. 그런데 한국에 온 지 겨우 2년만에 한국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휴 브라운은 결핵에 감염되었고, 선교사역을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패니가 1899년 3월 24일자로 미시간대학의 영문과 교수였던 아이작 데이몬(Isaac Demmon) 교수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아마도 패니가 의학과에 재학하고 있을 당시 아이작 교수와 가깝게 지낸 것 같고, 아이작 교수는 패니에게 한국선교와 휴의 죽음 등에 대해 궁금하여 패니에게 편지를 보낸 것 같다. 이에 대한 답신으로 기록된 편지가 바로 이 편지이다) 휴 브라운은 긴 순회전도여행을 했는데, 이 일로 이질과 폐렴에 감염되었고, 곧 결핵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그는 선교지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휴는 1893년 8월 30일자로 호주 선교사 매카이 목사의 건강에 대한 소견서를 쓰면서 한국에 체류할 만한 건강상태가 아니라고 판단했는데 이제 자신이 그런 상태가 된 것이다.
휴 브라운은 한국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1893년말까지 만 2년간 부산에서 사역하고, 아내와 두 아이를 남겨둔 채 1894년 1월 8일 부산을 떠났다. 부인과 동행할 수 없었던 이유는 둘째 아이 아그네스를 출산한지 오래지 않아 어린 딸과 같이 여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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