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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환대의 신앙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신10:19)'
2018/07/06 15:23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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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변환_822호-예멘 난민생활 모습.jpg▲ 예멘 난민 생활모습
 
 
1. 예멘 난민, 제주도에 오다!
 
지난 6월 한반도를 의미 있게 달구었던 것은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을 만난 것도 아니고, 2018지방선거의 놀라운 결과(부산의 경우, 지방 권력이 교체되었다)도 아니다. 나아가 러시아 월드컵의 열기(한국이 세계랭킹 1위 독일을 2:0으로 이겼다)도 아니다. 바로 제주도의 예멘 난민이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제주도 예멘 난민 수용이 사회적 화두로 확산되는 가운데 한국 국민 절반가량(49%)이 난민 수용에 반대한다는 여론조사가 발표됐다. ‘찬성한다’는 응답은 39%, ‘잘 모르겠다’는 응답은 11.9%로 집계됐다(리얼미터가 tbs 의뢰로 6월 20일 전국 성인 500명을 상대로 조사, 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4.4%포인트). 자기 집 근처에 자국민 장애아 교육시설이 들어오는 것도 반대하고,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종교가 다르다고 매국노로 취급하며, 성정체성이 다른 이들을 혐오하는 이 대한민국에 당연한 일이겠지만, 어쩐지 서글픈 생각이 든다.
다른 이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난민을 반대하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최후까지 나그네 된 자를 돌봐야 하는 것이 성경의 정신일진대, 이러한 배타성과 거부는 도대체 무엇인가? 현지인 대상의 절호의 선교 기회이자, ‘정착 골든타임(숙소와 일자리를 마련해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도록 돕는 3~6개월 정도의 기간)’을 놓치게 되면 또 다른 문제가 야기될 수도 있을 텐데! 따라서 이러한 새로운 시대적 전환, 그 골든타임에 우리는 우리가 당면한 새로운 시대의 화두인 환대에 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2. 환대에 대하여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J. Derrida)의 『환대에 대하여』는 1980년 소위 세계화의 바람과 함께 세계 경제에 불어 닥친 신자유주의와 국가 경계가 허물어진 초국가적 자본의 이동으로 인해 발생한 이주민과 난민, 이방인과 타자에 관한 유용한 지침서이다. 그리고 예멘 난민(은 물론, 앞으로도 다가올 이주민, 나아가 탈북자와 통일 이후의 인구 이동에 이르기까지)을 통해 타자를 어떻게 대해야할지를 고민하는 우리들에게 데리다는 ‘무조건적인 환대’를 주장하며 나름대로 타자에 관한 우리들의 행동을 제안한다.
데리다는 소크라테스를 끌어들여 논의를 시작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끊임없는 물음이 되기 위해, 즉 불편한 존재가 되기 위해 이방인을 자처한다. 그리고 이방인은 ‘우리(혹은 주체)’와 다른 것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이들은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다. 이방인은 우리의 문화를 변화시킬 수 있고, 토박이 집단에 혼돈을 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방인, 혹은 타자는 동일성 철학의 구조 안에서 극복되어야 하는 이질성으로 이해된다. 동일성을 파괴하는 오염이며 불편하고 위협적인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예멘 난민에 관하여 떠도는 소문(이슬람, 강도, 강간, 가짜 난민, 테러리스트 등)들은 바로 이러한 배타적 동일성 철학을 그 근저에 둔 배제와 혐오의 속삭임이다.
데리다에 의하면 이러한 이방인에 관한 환대(hospitality)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한다. 먼저, 칸트(I. Kant)로 대표되는 ‘조건적 환대(초대의 환대, 선별적 환대)’인데, 칸트는 환대를 적대시 당하지 않을 권리, 보호를 요청할 권리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전제 위에서 논의 한다. 가령, 주권자는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환대의 권리를 수용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환대는 데리다가 보기에는 ‘조건적 환대’, ‘법에 근거한 환대’, 곧 ‘관용(tolerance)’이라고 할 수 있다. 관용은 데리다에 의하면 권력자의 양보와 자비, 은혜 베풀기에 기댈 수밖에 없는 한, 그것은 ‘힘이 곧 정의’라고 하는 ‘최강자의 논리’편에 서있을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데리다는 강자의 자비가 이방인과의 평화로운 공존의 원리가 될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이방인과의 평화로운 공존의 관계를 만들수는 없다고 본다. 따라서 데리다는 관용을 극복할 윤리적 이념으로 ‘무조건적인 환대’라는 용어를 제안한다.   
조건적 환대를 넘어, 두 번째 환대인 ‘무조건적인 환대(방문의 환대)’야말로 데리다에게 관용을 넘어선 진정한 환대이다. 이것은 조건 없이 방문자에게 문을 여는 것인데, 어쩌면 두려움을 동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방인은 손님으로서 주인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리다에 의하면, 나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내 구역을, 나의 장소를 내어 놓아야 하는 일이 생길 때(지금 제주가 그렇다), 관용이 환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인 환대가 필요하다고 한다. 사실 신은 그 무조건적인 환대를 십자가 위에서 이루었다. 아들이 죽기까지 환대를 실천하셨던 것이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22:39).”는 말씀은 바로 이러한 환대의 가르침을 실천하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칸트의 ‘조건적 환대’인 관용을 넘어서는 데리다의 ‘무조건적 환대(방문의 환대)’는 지극히 성서적이다. 따라서 종교적 환대라고 고쳐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종교적인 환대’는 이방인의 조건을 따지지 않고, 굶주림이라는 단 한 가지 사실로 그들을 환대해야 한다. 가령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눅10:25-37)와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5:43~46)”라는 예수의 말씀은 종교적 환대를 잘 보여준다.
 
3. 환대는 시적이다

그러나 아낌없이 주는 것은 환상이다. 따라서 환대는 환상이다. “환대는 시(詩)적일 수밖에 없다.”라는 데리다의 고민은 이를 잘 표현한다. 현실적인 환대가 아닌 이념의 환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무한한 윤리성’에 의미를 두는 것으로 데리다는 자신의 책임을 회피한다.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은 것은 그의 철학이 해체는 하나, 재구성은 독자의 몫으로 맡겨놓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철학이 종교(십자가 희생)로 넘어가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센 것일까? 그래서 데리다는 환대의 문제를 결국 ‘물음’에 관한 문제로 던져버린다.
그렇다면 환대는 어디까지인가? 데리다는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롯의 가정 이야기를 인용한다. 두 천사가 롯의 집에 찾아오자, 소돔 남자들은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성관계)하리라(5절).”고 말한다. 그러자 롯은 두 딸을 음란한 소돔 남자들에게 내놓는다. 사사기 19장에도 비슷한 상황이 나온다. 한 노인이 자기 집에 찾아온 레위인 손님을 지키기 위해 자기 딸과 레위인의 첩을 찾아온 불량배들에게 내놓는다(24절). 그러자 “그들이 그 여자와 관계하였고 밤새도록 그 여자를 능욕하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 동틀 때에 여인이 자기의 주인이 있는 그 사람의 집 문에 이르러 엎드러져 밝기까지 거기 엎드러져 있더라(삿 19:25-26절).”라고 한다. 밤새 강간당한 레위인의 첩이 죽은 것이다. 그런데 데리다는 이 장면의 의미를 더 이상 해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조건적 환대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며, 더 중요한 것은 여기서 ‘환대의 법’을 만든 것은 가정의 폭군이었던 아버지, 그리고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내놓지 않고 자신의 소유물(딸과 첩인 여성)을 내놓은 것은 환대의 이름으로 차별을 구현한 것이다. 따라서 환대의 문제는 권력의 문제로 연결된다.
환대론 이후 『불량배들: 이성에 관한 두 편의 에세이』 (휴머니스트, 2003)에서 데리다가 파시즘적 국가 행태를 해체하려는 것은 바로 위와 같은 이유이다. 이러한 데리다의 ‘불량 국가’ 담론은 미국 대통령 아들 부시가 미국의 일방적 외교 노선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라크, 이란, 시리아, 리비아, 북한 등을 ‘불량 국가’로 규정했을 때, 노엄 촘스키 등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초법적 국제 테러 행위야 말로 ‘세계 최대의 유일한 불량 국가’라고 비판하면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데리다는 현존하는 모든 민주주의 국가는 사실상 불량 국가이며 따라서 우리는 불량 국가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결론을 짓는다. 그리고 그들의 환대는 관용은커녕 차별을 곤고히 하는 악마의 속삭임인 것이다.
 
4.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와 용서의 한계

레비나스는 타자의 관점에서 내가 가질 수 없는 타자의 절대성에 대한 나의 순종적 태도를 이야기한다. 나의 자유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절대성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현실성이 부족하고 ‘피학적인 주체’를 말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는 이방인과 타자, 이주민에 대한 탁월한 이해가 된다.
 
사실 레비나스는 ‘시간’이 아닌 ‘공간’을 사유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장소를 점유하고 있다는 것은 독특성을 지닌 유한함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타자에게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은 타자의 현존을 위해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고, 잊혀졌던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된다. 이를 위해 레비나스는 ‘거주’라는 개념을 통해 ‘자기를 추스르고 휴식을 취하며 불안정을 유예하고 향유를 예비할 수 있는 곳’을 상정한다. 그런데 이러한 나의 거주 공간에 환대를 통하여 타자를 맞아들이는 것이 바로 타자 윤리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왜 내가 나에게 익숙하고 안락한 세계를 열고, 위험 부담이 있는 나그네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내가 미래의 불안정을 덜기 위해 모아 놓은 노동의 산물과 향유의 대상을 나그네에게 내놓고 대접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레비나스는 ‘낯선 자가 헐벗고 굶주리고 가난한 자로 나에게 찾아오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여기서 그 낯선 자는 ‘무한자’이면서 가난한 자이다(역설적이게도!, 그리고 이것은 마태복음 25장에 잘 나와 있다). 게다가, 사실 집 주인 역시 처음부터 자신의 거주지에서는 손님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거류민이 너희의 땅에 거류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19:33~34).”
또한 레비나스는 ‘상처 입을 가능성(혹은 상처받을 수 있는 능력, vulnér-abilité)’을 ‘타자의 괴로움에 의해 상처받는 일, 타자의 비참함을 느끼는 고통에 노출되어 있는 상태’로 정의한다. 사실 삶은 무수한 상처의 흔적들로 채워진 것이 아닌가? 그리고 우리는 그 상처의 자국들을 외면할 수 없다. 상처에 취약한 몸(을 지닌 인간)과 상처입기 쉬운 유기체(로서의 공동체), 그것이 곧 우리 삶의 흔적과 인간 존재의 관계성, 그 핵심이다. 그리고 그 흔적에 관한 해결책이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초월’이며, 데리다가 물은 환상의 환대가 용서의 한계라는 구체적인 실천으로 육화되는 것이다.
레비나스의 초월 개념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용어는 아듀(adieu)이다. 어원적 의미로는 첫째, 타자와 만났을 때 하는 인사(축복) 둘째, 죽음을 포함해서 떠날 때 하는 인사(축복) 셋째, ‘신에게로 가다(à Dieu)’로 들 수 있다. 이 어원적 의미는 곧 ‘타자와 만남’, ‘존재의 타자로서 죽음에 직면’, ‘무한자에게로 초월’로 각각 상승(?)한다.
여기서 레비나스는 세 번째 의미인 신과의 만남은 오로지 첫 번째 의미인 타자와의 만남에 의존해서만 성립할 수 있다고 본다. 곧 타자에 대한 나의 윤리적 책임성은 나의 주체성의 본질적인 구조를 이루는 동시에 초월의 본질적 구조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겠는가? 따라서 내가 타자에 대해 윤리적 책임성을 지닌다는 것과 내가 주체로 선다는 것, 마침내 내가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은 동일하다는 이야기이다. 용서의 관점에서 보면, 용서의 한계는 초월의 이러한 의미를 깨달을 때 용서라는 말은 사라지고 타자에 대한 무제약적인 책임성만 남은 순수 종교의 형태를 요청한다.
지금 제주에는 예멘인의 모습으로, 당신의 집 앞에는 무엇인가(음식, 의복, 직장, 집 등) 결핍된 모습으로 나타난 하나님이 보이는가? 바야흐로 환대의 신앙이 우리를 부르고 있다.


최병학 목사.JPG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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