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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32]왕길지 선교사와 한영신
2018/06/25 14:32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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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길지 선교사가 부산에 도착한 날은 1900년 10월 29일 월요일 아침 9시 경이었다. 9월 19일 수요일 12시, 아내 클라라 베스와 세 아이 넬슨(Fred Nelson)과 허비(Herbert) 그리고 도라(Dora)를 데리고 일본 국적의 증기선 카수까 마루(Kasuga Maru)호로 멜버른 항구를 떠난 지 약 40일 만에 목적지 부산에 도착한 것이다. 그가 부산에 도착한 이후 맞은 첫 주일은 1900년 11월 4일이었다. 이때는 좌천동에 교회가 설립된 지 8년이 경과한 때였는데, 이날 예배에는 남자 15명, 여자 48명 총 63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이 교회가 바로 부산진교회였다. 이때의 예배장소는 다름 아닌 지금 좌천동의 여선교사들의 숙소, 곧 왕길지 선교사의 주택으로 사용된 건물식당이었다. 이날 왕길지는 영어로 인사를 겸한 첫 설교를 했고, 그 동안 주일 예배를 관장해 왔던 멘지스는 통역을 했다. 새로 부임한 서양 목사 선교사를 보겠다고 일부 신자는 초읍에서 먼 길을 걸어왔다. 12월 9일 주일에는 52명이, 16일 주일에는 50명이, 23일 주일에는 64명이, 그리고 성탄주일에는 성인 60명, 아동 57명 등 도합 117명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왕길지가 임지에 부임한 후 첫 세례식이 개최된 날은 1901년 2월 10일이었다. 이날 41명의 성인들과 27명의 어린이, 곧 68명이 세례를 받았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함께 세례 받는 일은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 특히 이날 7명의 가족과 6명의 가족, 곧 두 가정의 모든 식구가 세례를 받기도 했다. 어른들은 흰 한복을, 아이들은 색동옷을 깨끗이 차려입고 예식에 참석하였다.
그렇다면 이날 세례 받은 이들은 어떤 이들이었을까? 물론 일부의 수세자는 초읍에서 온 신자들이었고, 호주선교부가 운영하는 미오라 고아원의 장기미, 매머리(徐玫物)와 보배도 이때 세례를 받았다. 그런데 이 때 세례를 받은 한 여성이 한영신(韓永信, 1872- )이었다. 한모악(韓母岳), 한영일(韓永日), 혹은 남편의 성을 따라 양영일로 불리기도 했던 그는 1872년 김해의 소지주 집에서 출생했다. 보다 큰 도시인 부산에 살기를 원해 성황당에 가서 빌기도 했다는 이 여성은 중매로 부산의 양반집 후손인 양덕유(梁德有, 1873- )와 혼인하게 되어 자연이 부산진 좌천동으로 와 살게 되었다. 남편은 관직을 얻기 원해 두 차례 과거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고, 특별한 직업이 없어 생활이 곤궁해지자 부인 한영신은 장사를 시작했다. 콩나물 장사를 시작하여 콩나물 아줌마로 불렸다. 그러든 중 장터에서 호주 선교사 멘지스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되어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그리고 믿음이 깊어져 왕길지 선교사가 베푼 첫 세례식에서 세례를 받게 된 것이다.
이날 예배에서 “깨어라, 내 영혼”(Awake, My Soul) 즉 옛 시편 100편을 불렀고, 생키(Sankey)의 찬송곡을 번역한 “나의 죄를 씻기는”(What Can Wash Away My Sins), “예부터 도움 되시고”(O, God our Help in Ages Past) 찬송을 불렀다. 세례식은 성인세례로 시작하여 유아세례 순으로 진행되었다. 오후에는 감사 예배로 드려져 찬양과 기도로 진행되었는데, 남녀 교인들이 기도에 참여하여 중간에 멈추는 일이 없었다. 세례를 받은 한영신은 18세 때인 1890년에 출생한 첫딸 수혜를 데리고 교회 출석을 했는데, 수혜에 이어 유식, 귀추(귀염, 한나, 1893), 성숙, 은숙, 성봉(1900), 봉옥, 봉섭, 순옥 등을 차례로 출산하게 된다. 이런 연유로 그의 세 딸들, 곧 수혜 유식 귀추가 다 일신여학교에서 공부하게 된다. 후에 딸 성숙도 일신에서 공부했다. 말하자면 한영신은 여성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양한나와 후에 부산시장 농림부장관을 역임했던 양성봉 장로의 어머니였다.
예수를 믿게 된 한영신은 성경을 배우며 한글을 깨우쳤고, 1901년 처음으로 친정으로 가게 되었다. 그의 아들 성봉이 백일이 된 때였다. 이때 김해지방 첫 신자인 배성두를 알게 되어 함께 김해 지방에서 전도했다. 콩나물 장사를 하며 9남매를 양육하며 어려운 중에서도 교회를 위해 헌신하여 교회당 건축에도 정성을 쏟았고, 심지어는 함안 칠원의 칠원교회를 위해서도 물질을 드렸다. 칠원교회가 교회당을 건축하고 종(鐘)이 없다고 하자 70원을 주어 종을 구입하게 했다고 한다. 1901년 2월 10일의 세례식 다음 주인 2월 17일 주일에는 두 어린이가 다시 유아세례를 받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오늘의 부산진교회가 든든히 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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