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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 사회]다문화 사회와 환대
2018/05/28 09:17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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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수교수(신규).png
 
1. 들어가는 말
필자는 최근 한 지인으로부터 여행객으로 독일에서 겪은 경험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독일 어느 지역에서 매우 마음에 드는 물건을 구입하려고 하는데 가격이 50유로인데 달러를 가지고 있어서 고민 중이었다. 그런데 옆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독일남성이 조금 후 그 물건을 구입하고 나서 그 자리를 떠나려는 자기에게 그 선물을 건네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던 것이다. 그 지인은 곧장 뒤따라가서 독일남성을 만나 함께 사진을 찍고 깊은 감사의 표시를 했다는 것이다. 세계화·국제화 가운데 우리는 이런 경험을 매우 드물지만 할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무섭고 두려운 사회이기도 하지만 따뜻한 사회이기도 하다. 필자의 학교 학생들이 이슬람 사회에서 무슬림들을 통해 받는 환대를 수업시간에 가끔 듣기도 한다. 무슬림들이 자기들을 반갑게 맞이해주고 자기 집에 재워주고 맛있는 음식을 제공해서 며칠 동안 행복하게 지낸 적이 있다는 것을 여러 번 중동지역을 단기선교 경험에서 들은 적이도 있다. 다문화 사회에 환대가 중요한 주제이고 다양한 관점에서 환대가 다루어지고 있다.

2.본론
첫째, 선교학자의 환대에 대한 견해이다. 이주민을 위한 ‘환대(歡待)로서의 선교’도 생각 할 수 있다. 구약학자 모티머 아리아스(Mortimer Arias)는 “환대에 의한 구심적 선교 혹은 복음전도(Centripetal Mission or Evangelism by Hospitality)”를 주장한 적이 있다. 국내로 오는 수많은 이주자들에 대한 환대의 선교는 구심적 선교의 대표적 예이다. 특히 이주자로서 외국인 근로자 이방인 특히 무슬림에 대한 이슬람포비아와 ‘혐오사회’에서 환대가 주는 선교학적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한국교회가 국제 이주자 및 다문화 가정을 단순히 선교의 대상 즉 하나의 객체로 생각하기보다 그들을 진정 ‘하나님의 형상’으로 ‘환대’하는 것이 선교적 요청이다.
둘째, 철학자를 살펴보자. 포스트모던 철학의 주요한 주제가 환대이다. 유대인으로 리투아니아 출신이며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던 임마누엘 레비나스와 유대인으로 알제리에서 출생한 자크 데리다의 두 프랑스 철학자이다. 두 철학자는 유대인으로 이방인으로 겪었던 차별과 죽음의 고비를 겪었던 사람으로 타자와 이방인 및 이주자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혹자는 레비나스의 타자 중심의 철학 및 윤리의 철학을 데리다가 환대라는 주제로 해석하고 적용하였다고 평가한다. 그런 관계로 두 사람은 환대의 철학연구에 중요한 관계를 가지고 지내왔다. 자크 데리다(1930-2004)는 그의 책 「환대에 대하여」에서 “어떤 나라에서는 집안에 맞이하는 이방인은 하루 동안 신이다.”또 이방인에 대한 그의 유명한 경구,“내 집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소속과 이름을 묻지 말라, 단지 아픈 곳이 어디냐고 물어라”고 했다. 데리다의 환대에 대한 신학자 브루스마의 설명에 의하면 데리다에게 “환대란 문을 두드리는 낯선 자에게 무조건적으로 나의 모든 소유를 주려는 준비됨과 완전한 개방의 자세”를 뜻한다. 더 적극적으로 “환대는 타자의 희생이 아닌 자기희생을 뜻한다. 심지어 나그네가 나의 환대를 훼손할 가능성조차도 그 환대를 규제할 수 없다”. “데리다는 이 환대의 결과가 끔찍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즉 “이는 새롭게 오는 자가 선한 사람일 수 도 있고 악마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리다의 “환대는 절대적이며, 순수하고 무조건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순수한 환대가 궁극적으로 악마에 대해서까지 이용당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순순한 환대를 옹호하며 그는 조건적 환대를 폭력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거부한다. 따라서 브루스마는“환대에 관한 데리다의 이해는 다른 무엇보다도 어떠한 경계도 없는 개방성과 무조건성의 요구에 중심”을 두었다고 설명한다. 데리다의 이 환대에 대해서 기독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데리다의 무조건적 환대에 대해서 미로슬로브 볼프는 제동을 건다. “불의와 기만과 폭력의 세상 속에서 환대를 향한 의지와 환대의 제공은 무조건적일지라도 환대는 조건적 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데리다의 무조건적 환대에 대해 볼프는 현실적이고 균형 잡힌 환대를 주장한다. 하지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자기 주변에 강도들이 와서 자기를 살해하고 소유물을 빼앗아 갈 수 있을지도 생각하지 않았을까? 선한 사마리아인은 그 위험을 느끼면서도 치료하지 않았을까?
셋째로 소설이다. 소설이지만 무조건적 환대의 예를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Les Miserables」에서 찾을 수 있다. 남수인 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소설에 나오는 디뉴의 미리엘 주교는 문간에 나타난 이방인에게 문을 열고 이름이 무엇인지, 어디서 왔는지도 묻지 않고 환대를 한다. 무조건적인 환대. 그 결과는 무엇이었나? 환대받은 이방인은 주인을 해칠 생각까지 했고(실행은 하지 않았지만), 집안의 유일한 재산이라고 할 만한 것을 훔쳐 도망친다. 이방인을 환대했을 때 당할 수 있는 불행이 그러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집의 문을 틈새 없이 닫고 잠근다. 마음의 문도 꼭 잠그는 것을 미덕으로, 타자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그러나 무조건적 환대의 감화력이 어떠한지 그 사례를 장발장에서 잘 볼 수 있다”. 이 자세가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는 기독론적 선교가 아닐까? 이것이 몰트만이 그의 책 「예수 그리스도의 길」에서 그 길은 “그리스도론적 범주일 뿐만 아니라 윤리적 범주”이기 때문에 기독인의 그리스도적 사랑과 희생을 따라가는 윤리적 삶이 아닐까?
넷째, 환대는 성경적이다. 환대는 기본적으로 성경의 가르침에서 나온다. 데리다는 「환대에 대하여」 책에서 환대의 대표적 사례로 창세기 19장에 나타나는 소돔의 죄악으로 멸망당하게 될 상황에서 찾아왔던 천사를 대하는 롯의 예이다. 천사들과 성관계를 하고자 하는 소돔사람들에게 손님을 위해서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을 내어 놓을 정도로 손님에 대한 환대를 언급한다. 사사기 19장에 나타나는 성읍의 불량배들이 레위 남성과 성관계를 갖고자 할 때 나그네였던 레위인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처녀 딸과 레위인의 첩을 내주기까지 하는 나그네에 대한 환대의 문화를 보여준다. 혹자는 헨리 나우웬을 환대의 중요한 주창자로 보기도 한다. 그는 렘브란트의 그림 “돌아온 탕자”를 해설하며 하나님의 은혜로운 환대를 설명한다. 신약성경에 환대의 가장 대표적 사례가 탕자의 비유이다(눅 15:11-32). 어떤 점에서 환대의 가장 완벽한 모습은 성경에 있다. 그래서 부르스마는 환대를 신적인 덕(Divine Virtue)으로 간주한다. 레티 M. 러셀은 「공정한 환대」의 책에서 환대를 “서로 다른 사람들이 사는 세계에서 낯선 이들을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환영”으로 묘사한다.
다섯째, 환대와 아름다움이다. 이주민과 난민에 대한 환대의 섬세함과 배려가 미학적 접근은 기독교 철학자요 미학자인 니콜라스 월트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이다. 이 책을 번역한 배덕만 교수의 요약에 의하면 “그는 미학자로서 그의 전공을 정의에 대한 윤리적 성찰에도 적용한다. 그는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이 약자들의 삶의 미학적 차원에는 무관심한 모습에 크게 실망한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음식과 시설을 제공하면 그것으로 자신들의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지만, 인간으로서의 존엄은 결코 그런 수준에 머물 수 없다는 것이다. 정의가 인간의 가치와 인간의 권리 중에는 아름다움도 당연히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 대안으로, 월트스토프는 「하나님의 정의」에서 기독교 단체의 사례를 소개한다. 이 단체는 부동산 업자들의 도심개발에 반대하여, 도시빈민들을 위해 6백 여 개의 거주지를 건축하거나 개조했으며, 동시에 아름다움의 가치를 중시했다. 도심의 재개발 건축이라고 대충 저렴하게 만들 수 없었던 것이다. 그에 의하면“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자부심과 위엄을 부여하는데 도움을 준다. 도심기독연맹의 모든 집들은 아름답게 설계되고 주변 건축물과 조화를 이룬다.”필자는 금년 2월 그리스 아테네 난민 포럼에서 독일에서 난민선교사역을 하는 선교사들에게 독일의 NGO 단체들 중 중앙 및 지방정부 당사자들에게 난민들의 주거환경이 좋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고 더 나은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고 해당 공무원에게 계속적으로 요구한다는 것을 들었다. 처음에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의 요구가 지나치지 않은가 혹은 배부른 소리가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월트스토포의 주장을 들으면서 그 의식 있는 독일인들이 난민에 대한 정의로운 환대의 바른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3. 나가는 글
이주민을 위한 축제가 있는 섬김도 중요한 성경적 예이다. 즐거움과 축제가 있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이다. 그들이 한국에 노동으로 돈을 벌려고 왔지만 그것이 그들에의 전부가 아니다. 노동력으로 온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왔다. 노동운동가 전태일이 청계천 피복 공장에서 16시간 가까이 죽도록 일하고 인간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한 가운데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분신했던 비극적 역사를 가진 대한민국이 노동자로 일하러 온 이주민에게 일만 아니라 휴식과 즐거움의 축제를 제공한다면 얼마나 참다운 인간존중과 그들에 대한 배려인가.
예수님께서도 잔치를 허락하셨다.“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눅14:12-14)
도시선교학자 비브 그릭은 이 성경을 다음과 같이 적용한다.“우리는 삶을 즐겨야 한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과 함께, 가난한 자들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인간의 삶은 휴식과 함께 즐거움이 삶의 가치를 풍성하게 한다. 그것은 객과 나그네가 일하러 온 외국인 근로자가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즐거움과 축제를 즐기는 인간 존재로 대우할 때 그것은 인간존중을 보여주는 것이다.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햄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신16:11절) 즐거움의 축제가 이주민을 위한 환대이고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게 요구하시는 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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