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18.09.21 15:53 |
[문화]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싸움을 즉시 멈춰라!
2018/05/09 11:47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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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테일(detail)이 없으면 스케일(scale)이 없다. 각론은 없고 총론만 있는 현재의 상태로는 (한국 교회의) 미래가 밝지 못하다.” (성북교회 육순종 목사)
 
 
1. 희생 시스템
20세기 초, 덴마크의 육군대장 프리츠 홀름은 ‘전쟁절멸보장 법안’을 이야기 한 적이 있다. “각국에 이런 법률이 있다면 전쟁을 없앨 수 있다. 전쟁이 터지면 10시간 안에 다음 순번에 따라 최전선에 일개 병사로 파견한다. 첫째로 국가원수 둘째로 그의 친족 셋째는 총리, 국무위원, 각 부처 차관 넷째는 국회의원. 다만 전쟁에 반대한 의원은 제외. 다섯째는 전쟁에 반대하지 않은 종교계 지도자들!” 홀름에 의하면 전쟁은 국가 권력자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 국민을 희생시키며 일으키는 것이다. 따라서 권력자들부터 희생되는 시스템을 만들면 전쟁을 일으킬 수 없게 된다는 신선한 착상이다.
남북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이제 북미정상회담이 남았으나, 한반도에 평화의 물결은 뒤돌릴 수 없는 ‘하수(아모스 5:24)’와 같이 되었다. 비록 분열을 조장하고 평화체제에 배 아파하는 이(나라)들이 있지만 그들은 곧 역사의 물결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아무튼 홀름의 ‘전쟁절멸보장 법안’은 원전 문제에도 적용할 수 있다.『야스쿠니 문제』등의 저작을 통해 ‘국가와 희생’의 문제를 파헤쳐온 철학자이자 도쿄대 교수인 다카하시 데쓰야는『희생의 시스템, 후쿠시마 오키나와』(돌베게, 2013)에서 홀름의 제안을 원전 사고에 적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원자로의 방사능 누출을 막을 ‘결사대’에 총리(한국의 대통령), 각료(장관), 주무 부처 차관과 간부, 전력회사 사장과 간부, 원전 추진 과학자·기술자, 원전을 인구 과소지에 떠넘기고 전력을 써온 도시 사람들 순으로 파견해야 한다.” 따라서 데쓰야는 전후 일본 사회 속에서 ‘희생의 시스템’이라는 개념으로 원자력 발전의 후쿠시마와 미일 안보체제를 상징하는 오키나와 섬을 그 예로 들고 있다. 사실 ‘후쿠시마’는 후쿠시마 원전에서 일어난 중대사고와 그 영향에 관한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명칭이다. 데쓰야에 의하면, 원자력 발전은 추진되는 순간부터 희생을 상정하며 특정인의 이익을 위해 타자에게 모든 희생을 떠넘기는 국가적 희생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오키나와도 마찬가지이다. 주일 미군 전용시설 면적의 74%가 집중된 섬인 오키나와는 국가가 지속적인 희생을 전가함으로써 ‘본토’의 평화를 유지해 온 희생의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이 두 지역 ‘희생 시스템’의 구조를 통해 일본 사회가 구성된 것은 아닌지, 과연 경제 성장과 안보 같은 공동체 전체 이익을 위해 누군가 희생하는 시스템이 정당한 것인지를 데쓰야 교수는 묻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의 핵발전소와 ‘성주 사드’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휴전협정과 휴전선은 남북 모두의 희생 시스템, 그 견고한 틀이었다. 이것이 남북 두 정상의 만남으로 균열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평화의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참다운 제자도의 삶은 어떤 것일까?
텔레마쿠스-최병학목사.jpg
 
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싸움을 즉시 멈춰라”
이 말은 주후 4세기의 유명한 수도사 텔레마쿠스의 말이다. 그는 원래 세상을 등지고, 광야에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던 수도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하는 가운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지금까지는 세상을 등지고 살았지만, 이제는 늙어서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그러니 남은 기간 동안은 세상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 그리하여 텔레마쿠스는 그 당시 세계의 심장이라고 일컬어지는 로마로 갔다.
때마침 로마에서는 어떤 장군의 개선을 축하하기 위해서 축전이 열리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이 원형극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당시 로마는 이미 기독교 국가였지만, 주말이 되면 원형극장 안에서는 포로로 잡혀온 검투사들의 칼싸움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경기는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싸우는 경기이다. 로마 사람들은 그 잔인한 칼싸움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텔레마쿠스도 사람들 틈바구니에 싸여서 원형극장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드디어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두 명의 검투사가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황제 앞에서 인사를 하고, 죽기까지 싸우겠다고 맹세를 한다. 그런 다음 그들은 서서히 경기장 중앙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텔레마쿠스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이것을 막으라고 하나님께서 나를 로마로 보내셨구나!’ 텔레마쿠스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경기장 안으로 뛰어들면서 온 힘을 다하여 큰 소리로 외쳤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싸움을 즉시 멈춰라!”
처음에 사람들은 그것이 쇼의 일종인 줄 알고서 그저 웃기만 했다. 경기장 측에서 늙은 수도사 복장을 한 어릿광대를 집어넣어 경기를 흥겹게 해주는 것으로 생각을 했다. 그러나 텔레마쿠스는 두 검투사 사이에 들어가서 결사적으로 그 싸움을 막았다. 마침내 사람들의 입에서 야유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텔레마쿠스는 더 큰 소리로 외쳤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싸움을 멈춰라!” 급기야 경기를 진행시키던 지휘관이 검투사 가운데 한 사람에게 텔레마쿠스를 먼저 처치해버리라는 손짓을 했다. 번쩍이는 칼과 함께 텔레마쿠스는 피를 흘리면서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숨이 멈추기까지 계속해서 외쳤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싸움을 멈춰라!”
시간이 지나며 주변은 갑자기 숙연해졌다. 황제 호노리우스(Honorius)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그리고 말없이 경기장 밖으로 퇴장했다. 그의 뒤를 따라서 다른 사람들도 한 사람씩 두 사람씩 그 자리를 떠났다. 나중에는 두 검투사들마저도 고개를 푹 숙인 채 퇴장했다. 주후 391년에 있었던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로마에서는 더 이상 검투사들의 경기가 열리지 않았다고 한다.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외쳤던 텔레마쿠스의 외침과 그의 희생적인 죽음이 그 잔인한 경기를 종식시킨 것이다.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보며 그동안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애쓴 이 땅의 텔레마쿠스들의 모습이 눈에 떠오른다. 오늘 지하철과 역 앞, 이웃 종교의 사찰과 사당 앞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이들이 그들의 외침을 진정 외쳐야 할 곳은 평화적 만남을 방해하는 이 땅의 분단 세력들 앞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탄아 물러가라.”
 
3. 제자도: 믿음의 외적 실천
자신이 잘 훈련되어 있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훈련시킬 수 없다. 훈련되지 않은 사람이 총을 들면 그것은 흉기가 될 것이다. 『예수도: 몸으로 실천하는 진짜 제자도』(IVP, 2013)에서 예수님의 혁명적인 가르침을 삶으로 실험하고 자신의 경험을 나누는 일에 열정을 쏟아 온 저자 마크 스캔드렛은 “태권도 유단자가 되기 위해서는 훈련장에서 몸으로 부딪히며 기술을 익혀야 하듯이, 예수의 제자도는 영성의 훈련장인 우리의 실제 삶 속에서 연마되고 성숙되어 간다.”고 말한다.
달리기, 자전거 타기, 요리, 쓰레기 뒤지기, 커피 로스팅, 오랫동안 산책하기, 아내와 데이트, 아이들과 텔레비전과 영화 보기를 즐기는 스캔드렛은 개인 중심 실험, 그룹 실험, 장기 프로젝트, 1회성 실험, 4-6주간의 단기 실험, 6개월-1년 이상의 장기 실험을 어떻게 준비하고 실천하며 인도할 수 있는지를 실례를 통해 보여 준다. 예수의 제자도를 삶 속에 실천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실제적이고 창의적인 조언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를 통해 우리는 사회를 바꾸는 거대한 변화는, ‘한 사람의 작은 실험과 순종’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예수는 단순히 고상한 교리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며, 우리 삶에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셨다. 역사 속에서 그분의 삶에 매혹된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따르기로 선택하고 그분의 제자가 되어 그분이 가신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제자도는 개인주의적이고 지식에 치우칠 때가 많다. 따라서 지금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자처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세상에는 여전히 가난, 폭력, 착취, 경제적 불의와 다툼이 넘쳐난다. 스캔드렛은 진정한 제자도란 ‘믿음의 내적인 여정을 외적인 실천으로 나타내는 삶’이라고 말한다.
사실 스캔드렛은 오래전부터 기독교의 가치를 삶으로 실천하는 공동체 운동을 이끌어 왔다. 소유의 절반을 처분해 나누는 절반의 나눔 운동을 벌이고, 노동 착취와 인신매매에 바탕을 둔 불의한 경제 구조에 대한 저항 운동을 펼치는 등(이를 ‘노예해방 프로젝트’로 명명한다)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급진적으로 실천하는 일을 개발하고 가르쳐 왔다.
스캔드렛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소유의 극히 적은 부분만 나누어도 가난과 굶주림의 위기에 처한 전 세계 10억 인구를 살릴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돈과 소유에 관해 우리가 기존에 택해 왔던 방식들을 완전히 뒤집어엎고 있음을 깨달았다.” 물론 이러한 나눔을 실천하는 것은 어려움을 동반한다.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갈등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스캔드렛은 “노예 해방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우리가 배운 놀라운 교훈 가운데 한 가지는, 모두가 한마음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실천할 때에도 어려움을 겪는다는 점이었다. (…) ‘당신이 도장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도장이 당신을 선택한다.’ 변화는 프로젝트 자체를 통해서도 일어나지만, 팀으로 일하며 갈등을 통해 성장하는 가운데에서도 일어난다.” ‘더디 가도 지속적이라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진리를 보여준 것이다.  스캔드렛은 “우리는 그 운동에 헌신했던 수백 명과 더불어 우리 이웃들이 사는 지역에서 더디지만 지속적인 향상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했다. 또한 자유로운 이웃 운동을 통해, 소그룹이 창조적으로 동역할 때 그 파급력이 얼마나 커지는지를 깨달았다. 하나님의 치유를 일으키는 대리인으로서 우리의 목적을 실천에 옮기자 공공의식이 촉발되었다.”고 매듭짓는다. 통일운동, 평화운동과 더불어 이제 ‘노예해방 프로젝트’가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들로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잘 보여준다. 왜냐하면 서두에 인용한 ‘디테일(detail)이 없으면 스케일(scale)이 없고’, ‘각론은 없고 총론만 있는 현재의 상태’로는 한국교회의 미래가 밝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디테일과 각론은 한 사람의 변화로부터 시작된다. 이 미완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한 사람들의 연대가 될 것이다. 예수님 한분으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 운동이 12제자로, 나아가 초대교회로, 마침내 우리들에게까지 전해졌던 것처럼!
 
4. 미완의 시대, 끝나지 않은 싸움
영국의 가장 뛰어난 역사가 중 한명이자, 평생 마르크스주의를 고수했던 진보적 지식인인 에릭 홉스봄(E. Hobsbawm)은 자신의 자서전인『미완의 시대』(민음사, 2007)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혁명은 모두 종결된 꿈이다. 그러므로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든 다른 방식의 사회를 희망하지 않으면 안된다.” 홉스봄은 산업혁명과 프랑스 혁명을 다룬『혁명의 시대』(1962), 유럽 자본주의의 성장을 다룬『자본의 시대』(1975), 부르주아 자유주의와 식민지 전쟁을 다룬『제국의 시대』(1987) 3부작으로 19세기가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시작하여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끝났다고 주장하며, ‘긴 19세기’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적이 있다.  역사가의 과업에 관해 ‘단순히 과거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하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현재와 관련성을 제시하는 것’을 주장하며 자본주의의 모순을 끊임없이 지적하며 새로운 인식의 필요성을 주장했던 에릭 홉스봄은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곧, ‘위대한 위인들의 이야기’, ‘당연한 결과가 있다는 목적론적 인식’, 기후가 온난하고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있는 땅에 사는 사람들이 당연히 강한 힘을 갖게 된다는 ‘지정학적인 논리’, 모든 것이 운과 불운의 결과일 뿐이라는 ‘카오스 이론’까지)을 설명하며 이 모든 것을 넘나들면서도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보통 사람들’이라는 통찰을 우리들에게 전해준다. 홉스봄은 이렇게 말한다.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무기를 내려놓지 말자. 사회 불의에 여전히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남북정상회담만으로 이 땅에 평화가 오지는 않는다. 희생 시스템은 얼마나 견고한지! 촛불혁명에 참여한 깨어있는 시민들이 이 미완의 시대에 그리스도의 제자로 제자리를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루이제 린저도『생의 한 가운데』(문예출판사, 1998)에서 주인공 여류소설가 니나 부슈만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했다. “과연 무엇이 진정으로 용기 있는 행동일까, 겁에 질려 미지의 해안으로 달려가는 것인가, 아니면 그전부터 가치 있었고, 아마도 앞으로 영원히 가치 있을 것들을 위해 제자리를 지키는 것인가?”
생의 모든 것을 껴안는 니나와 달리, 니나를 죽을 때까지 사랑한 슈타인 박사는 고통을 피하고 안정을 지향하며 관조적인 삶을 살았다. 이것을 안타까워했던 니나의 말은 미완의 시대, 다시 뒤로 돌아가는 이들에게 주는 충고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선한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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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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