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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27] 부산 경남지방에서의 첫 수세자들(2)
2018/04/09 11:49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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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방에서의 첫수세자는 한 남자와 두 사람의 여성 곧 세 사람이었는데, 그들이 심상현(沈相炫), 이도념(李道恬), 그리고 귀주(貴珠, 성 미상)였다. 호주선교사들의 기록에서는 첫 수세자를 Sang Hyen, To Nyem, Koui Chou 등으로 표기했고, 윌리엄 베어드는 189453일자 일기에서 Sim Syang Hyun, Yi To Nyam, Kwichyoo 로 표기했는데, 이들이 심상현 이도념 그리고 귀주였다는 점을 알게 된 것은 심사현의 편지를 통해서였다. 심상현이 세례를 받았던 4월을 전후하여 무어(Moore) 등 여 선교사들은 빅토리아의 발라랏(Ballarat)에 사는 기도 후원자들에게 심상현의 주택을 구입하기 위한 모금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는데, 이 편지는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의 기관지 중 하나인 레코드에 게재되어 있다[Record of Church of Australia and Tasmania. Vol. VI. No. 8 (Aug. 1894), 5 참고]. 이 편지를 받은 신자들이 은밀하게 기도하는 중에 환우(患友)기도회”(Invalids' Prayer Band)가 정성껏 모금한 후원금을 부산에 송금하였고, 선교부는 이 돈으로 부산진의 선교사관 맞은편 한옥을 매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이곳에 거주하게 된 심상현은 환우들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에서 심상현은 후원금에 대하여 감사한 후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자녀가 되도록 하셨지요. 귀주(Koui Chou)는 불교를 신봉하던 나이 드신 부인의 새 이름인데 귀한 진주’(goodly pearl)란 뜻이지요. 또 다른 부인(Archie)의 새 이름은 도념(To Nyem)인데 순수한 도’(doctrine pure)란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의 새 이름은 상현(Sang Hyen)인데 서로 밝음’(both bright)이란 뜻이지요라고 이름의 뜻을 설명하였다. 이 정보에 근거하여 세 수세자의 이름이 정확하게 심상현(沈相炫), 이도념(李道恬)과 귀주(貴珠)임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외국인들은 한국의 지명, 인명 등 고유명사에 대한 표기가 부정확하거나 완전하지 못한 점을 고려해 볼 때 심서방의 편지는 매우 중요한 정보가 아닐 수 없다.
첫 남성 수세자는 심서방(Sim Sye Bang)으로 불렸는데, 세례받을 때까지 2년간 멘지스 선교사의 첫 한국어 선생이었다. 맥카이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원래 유학에 조예가 깊은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멘지스의 어학선생이 되었으나 선교사가 주관하는 집회에 참석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멘지스의 끈질긴 노력과 오랜 기도의 결과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고, 드디어는 세례를 받게 되었다. 심서방의 친구들은 그에게 신앙을 버리도록 여러 차례 권고하였으나 그의 결심은 견고하였다. 심서방을 189446일과 16일 두 차례 면접했던 배위량의 416일자 일기는 이 점을 보여준다. 베어드는 심서방은 틀림없는 없는 신자라고 하면서 가족의 구원을 위해서도 크나큰 관심을 보였고,” “조상 제사도 지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맥카이 선교사의 기록에 의하면, 심서방은 외모도 훤출했고, 일본어와 중국어는 물론 영어까지 구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이도념은 나이가 지긋한 여성으로 페리(Jean Perry)의 조수로서 고아들을 돌보는 보모였다. 분명치 않으나 한때 광대 혹은 기녀(妓女, dancing girl)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가하면 귀주라는 여성은 열성적인 불교도였다. 그러나 선교사집을 구경하러 왔던 일을 계기로 신자가 되었고 세례까지 받게 된 것이다.
이 날 세례식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서 1891년 이래 부산에서 사역하였던 배위량 선교사가 집례하였다. 이 당시 호주 선교부에는 멘지스, 페리, 무어 등 세 사람의 여선교사만 있었다. 맥카이 목사는 건강 때문에 부산을 떠나 18931013일 멜버른으로 돌아가 있었고, 맥카이 목사의 뒤를 이은 아담슨(A. Adamson) 목사는 1894520일 임지인 부산으로 왔으므로, 18944월 당시 호주 선교부에는 목사 선교사가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상황 때문에 부산에 주재하던 미북장로교 선교사 배위량 목사가 세례식을 집례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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