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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36 : 양
2018/03/12 15:05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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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과 어린양 신학, “미투”

1. 종말론
2001년 9월 11일 ‘911 테러’ 사건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테러와 악의 존재에 대한 답과 그 의미를 성서에서 찾으려고 노력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 부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힘을 빗대면서, 공식적으로 ‘악의 축’과 싸우는 미국인들의 힘을 성서에서 찾았다. 하지만 테러와 악에 대하여 성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오늘 이 세계를 위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서 성서는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많은 해답들을 기독교 성서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서 볼 수 있으며 오늘날 널리 퍼지고 있는 종말론(Eschatology)에서도 볼 수 가 있다.
폭력과 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이 지구촌에 요한계시록이나 다니엘서와 같은 묵시록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 종말론과 같은 잘못된 종말론이 판을 치고 있는 이 때에 기독교 근본주의에 기초한 기독교 종말론 소설들, 영화, 그리고 어린이를 위한 게임 등의 ‘휴거산업’은 우리의 영성에 어떠한 해악을 끼치고 있는가? 더 나아가 잘못된 종말론의 영향으로 인
한 미국의 중동정책은 국제 정치에서 어떠한 의미를 던져주고 있는가? 실제로 미국의 종교사회 학자들은 미국 기독교인의 45%가 휴거나 아마겟돈 전쟁과 같은 부류의 종말론을 믿고 있다고 하는데, 이들은 중동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강력히 지지하는 사람들이다. 가령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규정해 버린 트럼프의 정치적 행동을 무조건 찬성하는 것이다.
사실 종말론에 관한 입장은 인류의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일어날 사건이나 우주의 마지막에 대한 신학적 이론이다. 그 근거는 마태복음 24장 예수께서 언급한 내용에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을 조직신학의 한 부분에서 ‘개인의 죽음’과 ‘인류의 최후의 심판’에 대한 내용으로 다루게 되었는데, 부활 승천한 예수 그리스도가 마지막 때에 다시 재림하는 것이 기독교 종말론의 핵심이다. 슈바이처 (A. Schweitzer)의 연속적 종말론(Konsequente Eschatologie), 도드(C. H. Dodd)의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 불트만(R.
Bultmann)의 실존적 윤리적 종말론, 몰트만(J.Moltmann)의 혁명적 종말론, 오스카 쿨만(O.Cullmann)의 구속사적 종말론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현대신학자들의 종말론의 특징을 세 가지로 정리해 보면, 첫째 ‘유대교의 묵시문학적 종말론’으로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슈바이처와 바이스가 예수의 종말론을 연구한 결과 얻은 결론으로 미래 대망적 종말론이다. 이러한 종말론은 미국의 천년왕국 운동자들에 의해서 재강조 되었다. 둘째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강조하는 견해로, 도드의 실현된 종말론에서 시작되어 여러 가지 실존주의적, 윤리적 종말론과, 최근에 이르러 정치신학과 결부되어 혁명적 행동의 이념으로 이해된 종말론이다. 마지막으로 종말론을 구속사적으로 보면서 ‘약속과 성취’라는 구조 안에서 그 나라의 양면성(‘이미’와 ‘아직 아니’)을 강조하는 경향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 측면과 차원에서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했으나, 아직도 종말론(하나님 나라)은 풀기 어려운 신비로 남아 있다.

2. 거짓된 휴거와 기획된 미래
종말에 관한 소설들을 살펴보면 성서의 문자를 폭력적으로 해석하며 세상의 종말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러한 경향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설교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유엔의 평화 정책이 실패하였고, 지진과 같은 자연 재앙과 테러 등을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가르친다. 더구나 이들 중 몇몇은 신의 각본에 의한 우주적 종말인 피비린내 나는 ‘아마겟돈 전쟁(Armageddon)’ 속으로 이 세상은 초읽기에 들어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성서의 종말에 대한 내용을 다루는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은 그들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 한 소설이 성서의 이야기를 왜곡하며 꾸며낸다는데 있다.
아마겟돈은 세대주의 종말론이 갈망하는 사건 중 하나이다. 사실 아마겟돈이라는 말은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단 한번 등장한다(계 16:16). 그러나 세대주의 종말론은 이 단어가 요한계시록의 가장 중심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아마겟돈이 단순히 단 한번 수행되는 전쟁이 아니라 적어도 네 번의 전쟁으로 팔레스타인 곳곳에서 수행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첫 번째 전쟁은 페트라(Petra) 또는 에돔(Edom) 지역(현재 요르단 지역)에서 일어나는데, 이곳은 ‘주님의 옷이 적들의 피로 얼룩지는 곳’이며 상상할 수 없는 두렵고 충격적인 군사적인 참상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은 자신들이 아마겟돈 전쟁을 갈망하는 이유가 예수의 재림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는 폭력과 전쟁을 일삼으면서 재림하지 않으신다. 그럼 무엇 때문에 이토록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은 재림에 열광하는가? 어떤 이유로 그들은 피와 죽음을 강조하는가? 그 대답은 간단하다. ‘성자들은 땅에서 하늘로 휴거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은 자신들이 하늘로 휴거 된 이후, 저 높은 하늘에서 이 땅에 남겨진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과 세상의 종말을 구경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과 위배되는 행위이다. 이웃이 고통 받을 때, 자신들은 폭력의 고통에서 탈출하여 휴거 된다는 아주 이기적인 신학이다. 마치 영화관 앞자리에서 총격전을 관람하듯 휴거된 이들은 하늘이라는 2층 특별석에서 지구에 남아 있는 자들의 종말을 구경하겠다는 것이다.
사실 요한계시록은 근본주의자들이 익히 알듯이 선한 서구(미국과 이스라엘)가 악한 중동(구체적으로 아랍 이슬람)을 쳐부수는 아마겟돈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 한복판에서 평화를 외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우리로 하여금 양을 치는 목자와 같은 하나님의 마음으로(God’s Shepherding Lamb) 우리의 삶을 성찰하도록 이끌며 폭력과 힘의 구조를 성찰하도록 가르친다. 동시에 억압의 구조에 도전하고 새로운 희망을 꿈꾸도록 가르친다. 더 나아가 요한계시록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하나님께서 거주하시는 땅임을 이야기 한다. 이렇듯 요한계시록의 오독(거짓된 휴거와 기획된 미래)은 파괴주의 종말론을 형성하고 종말론적 광신을 불러일으킨다.

(최병학 목사)문화펼치기 36-양.jpg
 

3. 어린양의 신학
예수는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이다.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묵시(1:1)’ 라는 제목으로 시작한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가장 원초적인 목적은 ‘예수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지, 중동이나 유럽의 마지막 시대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예수는 누구인가? 이 책에서 예수의 이미지는 처음에는 검을 가진 위엄 당당한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나중에는 어린양의 모습으로 대체된다. 그리고 어린양은 요한계시록의 모든 부분을 지배하는 요소로, 144,000명의 거룩한 시온 산 전사를 소집하고(14:1), 악한 적과 싸우며(17:14), 전쟁이 끝난 후에 결혼을 하며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19:7, 22:3). 실제로 요한이 사용한 헬라어 ‘양’은 단순히 어린양이 아니라, 정말 작다는 것을 뜻하는 단어로 ‘어린 양’, ‘작은 양’(아르니온)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 단어는 신약성서에서 오직 예수가 자신의 제자들을 파송 할 때만 사용한 것이다. 가령,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눅10:3).” 그 어떤 묵시문학도 신적인 존재에 대해 어린양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유대교의 관점에서는 결코 어린양이 메시야가 될 수 없다. 예수에 대한 이러한 이미지는 가장 연약한 모습의 예수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면서 역설적으로 가장 강력한 표현이 된다. “예수는 십자가에 죽었지만 다시 살아 나셨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의 어린양 이미지는 로마제국의 폭력을 무효화시키는 하나의 대안으로 1세기 초대 기독교인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은 로마의 군사적 승전 이데올로기(팍스 로마나)가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던 시기에 쓰여 졌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은 용감하게도 로마가 아니라, 하나님과 어린양이 이 세상을 다스린다고 선포한다. 세상은 그 어떤 제국이나 강대국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나 노예들이 다스린다는 것이다. 요한이 있었던 에베소는 노예무역의 중심적인 도시로서 초대기독교인들은 이 도시에서 노예였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제국 전체 인구의 약 30% 이상이 노예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요한은 노예들도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는 아주 획기적인 선언을 한 것이다. 가장 힘없는 노예들에게 요한의 이러한 약속은 그들의 삶에 얼마나 큰 힘과 용기를 주었을까! 어린양은 식민지 노예들에게 제국주의 고통에서 구출하며 폭력, 욕심, 두려움, 그리고 불의에 중독된 그들을 자유롭게 하신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날마다 경험하는 출애굽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는 오늘날 가장 힘없고 나약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제공해주고 있다. 결국 요한계시록은 진정한 힘이 과연 무엇인지 보여준다. 곧. 우주의 가장 중심에 서 계시는 예수의 힘은 하나님의 희생양이라는 것이다.
구약성서 이사야 53장의 내용(유대교가 인정하지 않는)을 기억에 떠올리면, 예수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면서 침묵하는 어린양과 같은 이미지와 유사하지만, 요한계시록의 어린양은 결국 승리로서 장식한다. 그 승리는 군사와 전쟁을 통한 승리가 아니라, 자신을 죽이고 희생함으로써 승리를 장식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요한계시록의 시작부터 끝까지 바로 이러한 ‘십자가의 신학’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능력과 힘은 약함에서 드러난다는 놀라운 아이러니의 신학인 것이다. 이러한 신학은 바울의 서신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어린양 신학은 요한계시록의 전체 메시지를 대변한다. 악은 폭력과 군사적인 힘에 의해서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어린양의 사랑의 희생으로 정복된다는 놀라운 신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신학은 희생자가 승리자가 되는 또 하나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어린양 신학은 진정한 승자(Nike), 곧 최후의 나이키가 누구인지를 잘 보여준다. 어린양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이들 역시 ‘승리자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이 가지고 있는 신학의 핵심이다. 사실 요한계시록의 많은 부분들은 폭력적인 장면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이러한 폭력의 이면에 있는 신학적 의미들을 파악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승리자와 정복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한다. 바로 어린양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은 싸움이나 전쟁을 통해 얻어지는 승리가 아니라, 희생과 사랑으로서 얻어지는 승리인 것이다. 이러한 폭력에 대한 대안적인 면을 가진 ‘어린양 신학’은 세대주의 종말론이나 파괴주의 종말론에서는 도저히 찾아 볼 수 없는 귀중한 메시지이다.

4. 어린양, 미투
이러한 어린양의 비전은 놀라운 이미지이자 동시에 적개심을 없애는 위대한 비전이다. 왜냐하면 로마제국의 승리 이데올로기에 비하면 요한계시록의 어린양 이미지는 너무나 나약하고 보잘것 없기 때문이다. 군사적 힘을 의지하는 관점에서 보면 어린양의 이미지는 비폭력을 상징하고 있다. 로마제국의 잔인한 살육에 대하여 요한계시록은 자기 자신을 살육의 희생 제물로 바치는 어린양의 이야기를 통해서 새로운 세상의 모습을 그려주는 것이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미투 운동 역시 남성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잔인한 폭력의 희생양으로 고통받던 여성들이 어린양과 같은 비폭력적 고백운동을 통해 새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어린양과 같은 힘을 가지라고 요청한다. 우리로 하여금 어린양과 같은 삶을 실천하며 살아가기를 가르친다. 즉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어느 곳에 있든지 어린양과 같은 삶을 살아갈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사실 어린양의 힘은 상처받기 쉬운 연약한 힘이지만, 동시에 세상을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사랑의 힘이다. 어린양의 힘은 비폭력적의 힘이자, 불의에 저항하는 용기이다. 미투 운동이 그렇다. 어린양의 힘은 견고한 힘으로서 용서하는 힘이다. 미투 운동이 지향해야 할 목표이다.
이 험난한 세상에 우리는 언제든지 ‘어린양의 힘’과 ‘짐승의 힘’ 둘 중 그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운명에 처해있다. 어린양의 힘을 선택한다는 것은 우리가 십자가 희생의 사랑의 정신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사랑은 정의(혹은 하나님의 의)와 함께 하는 사랑이다. 따라서 어린양의 힘은 희망과 저항을 향한 우리들의 노력이며 실천이다. 또한 어린양의 힘은 짐승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우리의 노래이며 결속력이다.
우리는 요한계시록 말씀을 통하여 비폭력적인 어린양의 힘과 증언으로 이 불의한 세상(짐승들, 즉 바벨론/로마제국)을 정복하였음을 듣는다. 그들은 신성한 하나님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초대하여 생명의 강과 나무를 상속하실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복된 소식은 이미 우리가 이 하나님의 비전을 맛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어린양이 가신 비폭력의 길과 정의의 길처럼 평화와 사랑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어린양, 미투!” 왜냐하면 이러한 새 세상으로 어린양은 우리 모두 오라고 초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22:3-5).”

최병학 목사.JPG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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