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수정)탁지일 교수.jpg
나가사키의 잠복 그리스도인처럼 신앙의 본질 지키는 거룩한 부산 되길

부산의 기독교 유적지 탐방자료를 만들기 위해 찾았던 나가사키를 두 번째로 방문했다. 이전에 비해 가톨릭 유적지를 비롯한 문화관광자원의 개선이 눈에 띄었고, 특히 한국어로 된 상세한 설명이 가는 곳마다 추가되어 있어 불편함이 크게 줄었다. 큐슈의 나가사키와 부산의 중구와 동구는, 역사성, 접근성, 연계성 면에서 뛰어난 근대화 및 기독교역사 탐방지이다. 물론 원폭피해와 한국전쟁의 상흔도 그대로 남아있는 유사성도 갖고 있다.
나가사키와 부산은 여러 가지로 닮은 점이 많다. 첫 번째로, 쇄국정책의 빗장이 풀린 후 외국인들의 내한과 정착이 시작된 곳이다.
1853년 개항 후 나가사키에는 외국인 거류지가 형성되고, 일본 내지와 한국으로 이어지는 교류와 교통의 중심지로 발전한다. 부산의 형편도 비슷했다. 1876년 개항 후 배편을 통해 조선을 찾는 모든 외국인들이 정착하거나 경유해야만 했던 조선의 관문 역할을 했고, 부산을 통해서 제물포와 원산으로 갔다.
이로 인해 중국 상해에서 출발한 알렌, 그리고 미국에서 출발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등 조선을 찾았던 모든 선교사들이 첫 발을 내딛은 곳도 부산이었다. 부산은 복음의 씨앗이 처음 뿌려진 은혜의 땅이 되었다. 이후 평양과 서울과 함께 조선의 주요 선교거점으로 인식되었고, 캐나다선교사인 제임스 게일과 로버트 하디, 미국선교사인 윌리암 베어드와 부인 애니 베어드, 그리고 호주선교사인 헨리 데이비스 등이 부산경남을 향한 첫 선교의 문을 열었다.
나가사키도 부산과 다르지 않았다. 1549년 8월 15일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가고시마로 들어와 선교를 시작한 후, 1597년 2월 5일에는 26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나가사키에서 처음으로 순교를 당한다. 이후 나가사키는 가톨릭 선교의 중심과 상징이 되었고, 수십만의 신자들이 생겨난 일본 가톨릭의 성지가 된다. 1853년 일본 개항 이후에는 일본의 관문 역할을 하면서 한국으로 들어오는 선교사들의 경유지 역할을 하게 된다.
두 번째로, 나가사키와 부산은 비슷한 아픔을 가지고 있다.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02분 원자폭탄이 떨어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나가사키에는 원자폭탄이 떨어진 지점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원폭자료관에는 그 당신의 참상이 고스란히 전시되어있다. 유리와 철마저 녹여버렸던 열기 속에서 죽어가던 사람들은 물을 애타게 찾았고, 이러한 이유로 원폭자료관 곳곳에는 물을 주제로 한 조형물들이 만들어져 있다.
부산도 한국전쟁으로 인한 아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2300여명의 20대 전후의 유엔군들이 묻혀있는 세계유일의 유엔묘역이 조성되어 있고, 부산 곳곳에는 아직도 피난민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중구 동광동 40계단문화관에서 피난지 부산의 모습이 만날 수 있고, 교회와 가정과 거리마다 피난의 이야기들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1952년 피난지 부산에서 만들어진 찬송 “눈을 들어 하늘 보라”의 내용처럼,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 소리가 들리고, 빛을 잃은 많은 사람들이 길을 일고 헤매며, 탕자처럼 힘없이 살아가는 곳이었다. 원폭 이후 나가사키의 모습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나가사키에는 26명 순교이후 무려 250여 년간 기독교가 금지되었다. 놀라운 일은 이 기간 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온 신앙고백이 “잠복 그리스도인(카쿠레 키리시탄)”을 통해 이어져 왔다는 사실이다. 1864년 나가사키에 지역에 남아있는 이들의 존재가 처음 알려져 세계를 놀라게 했다. 복음의 씨앗이 처음 뿌려진 부산, 한국전쟁 당시 복음의 열매를 아픔 가운데 정결하게 보호했던 피난지 부산, 하지만 지금은 수많은 이단들이 생겨나 활동하는 신앙수호의 최전선이 되었다. 나가사키의 잠복 그리스도인들처럼,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신앙의 본질을 지켜 나아가는 거룩한 도시 부산으로 세워져야 한다.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탁지일 교수의 이단 바로알기] 나가사키와 부산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