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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 사회] 다문화 사회, 역지사지
2017/12/18 15:38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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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수 교수.jpg
다문화 사회는 하나의 거대한 시대적 흐름입니다. 세계화와 지구화 현상의 반영입니다. 미국의 미래학자 존 나이스빗 (John Naisbitt)은 그의 저서 「메가트렌드(Megatrends)」에서 미래의 사회를 “탈공업화 사회, 글로벌 경제, 분권화, 네트워크형 조직 등을 특징으로 하는 사회”로 보았고 그런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시대적 조류를 뜻하는 말로 “메가트렌드(Megatrends)”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표현이 오늘날 다문화 사회에 적용될 수 있는 적절한 용어입니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세계적 흐름 가운데 경제의 자유화, 과학 기술의 발달로 항공을 통한 인류의 자유로운 이동 그리고 통신기술의 발달로 점점 더 세계는 하나의 ‘지구촌’(Global Village)으로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특히 이것은 한국사회의 초고령화 사회, 재앙에 가까운 초저출산 그리고 젊은이들의 3D 직종 기피, 한국경제의 괄목할 만한 성장과 한류의 열풍의 영향으로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가운데 수많은 외국인의 유입으로 한국의 다문화 사회는 점점 더 가속화되리라 예측할 수 있습니다. 지난해 통계로 국내 외국인 거주자가 200만 명이 넘었고 심각한 저출산으로 외국인 노동력을 더 많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2022년에 300만 명 2030년 대 50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다문화 사회에서 우리가 만나는 이주민 및 다문화 가족을 이해하기 위해국경을 넘어 세계로 나간 한국인들의 다문화 경험을 살펴보는 것도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우리 조상과 부모, 형제가 멀리 타국에서 겪었던 고통과 차별, 박해와 배제로 얼룩진 생생한 이야기를 우리가 주목할 때 우리 부모와 형제가 당한 일들이 국내 이주민과 가족들에게 반복해서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 길입니다.
전 세계 이주민을 약 2억 명으로 파악합니다. 우리 가족들 중 한 두 사람은 이국땅에서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을 생각할 때 우리 주변에 있는 외국인들을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나그네를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기독인들은 그들을 우리 가족들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어느 구약학자는 ‘환대로서의 선교’를 주장했습니다. 이주민들을 우리에게 보내신 가족 혹은 손님으로 환대하는 자세가 선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를 통해 우리가 왜 다른 민족과 문화를 좀 더 이해해야하는지, 그리고 더불어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다문화 이해에서 역지사지의 태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1. 한국의 해외이주민의 상황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대표적 디아스포라의 나라입니다. 남북한 인구가 7,500만 명인데 해외에서 살아가는 교포는 약 750만 명입니다. 남북한 전체 인구의 10%입니다. 이것을 중국과 비교해보면 놀라운 수치입니다. 해외 중국인 화교는 약 5500만 명 정도인데, 13억 인국에 비하면 1.8%에 불과합니다. 인구 10억을 넘는 인도도 해외 인도인은 500만 명입니다. 인국 1억 3천만의 일본은 해외 인구가 약 200만 명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남북한 인구 전체와 비교할 때 전 세계 오지까지 흩어져서 살아가는 디아스포라의 숫자와 인구 비율은 한국이 단연 최고입니다. 이런 통계가 어떻게해서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한국이 너무나도 살기 힘든 질곡의 역사를 겪는 가운데 국내에서 살기가 매우 힘들어 해외로 나가게 되었던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또한 그런 상황가운데 그것을 극복하고 좀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한국인의 도전적 진취적 정신도 한몫도 했다고 생각합니다.

2. 사할린과 러시아,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까레이스끼’로 알려진 러시아와 중앙 아시아의 한인들은 천대와 차별 속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살아가야 했던 한인디아스포라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한인들의 삶은 한민족이 거쳐 온 비운의 역사를 그대로 대변합니다. 이들은 대부분 봉건적 착취와 식민지압제에 못 이겨 고향을 떠났고, 후에는 독립운동을 하러 이주해간 사람들과 후손들입니다. 이들은 수많은 다른 민족들의 차별과 착취, 남북한 동포들의 무관심속에서도 자신들의 삶을 개척해갔으며 낯선 타지에서 고귀한 삶의 터전을 만들었습니다. 그 후예중의 한사람의 고백에 의하면 자신의 이런 시절을 이렇게 회고 합니다.
“내가 채소 밭에서 막 기어 다니기 시작했을 때에는 아직 한 돌도 지나지 않은 때였다. 그 때 어머니는 나에게 잡초 뽑는 일을 가르치셨다”

3. 일본 속에 살았던 한인의 상황
이민 1세대들은 일본에서 뿌리 깊은 편견과 차별의 대상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으로 강제 연행되었던 조선인들의 기억은 부관연락선에 관한 아픈 기억으로 표현됩니다. 부관연락선이 어떤 비극을 안고 있는 배입니까. 한민족의 애환을 고스란히 실어 나른 배요, 그 배로 정신대를, 광부를 합병으로 끌려갔던 그 많은 조센징들이 타고 갔던 배이고 대개는 노예나 다름없이 목숨을 부지하다 죽거나 불구자가 되거나 폐인이 되어 귀국했던 그들의 비극을 실어 나른 것이 부관연락선입니다. 재일한인들은 일본에 눌려 살면서 모진 고생을 했습니다. 이들은 돼지를 키우고 밀주를 만들고 시래기를 주위 시장에 내다 팔면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이들은 지지리도 못 살던 조국을 떠나 공장, 건설현장, 파친코업소, 불고기 집 등을 전전하면서 변두리 인생을 살아야 했으며 2세들이 대학을 나와도 일본사회의 철옹성 같은 벽을 깨지 못하고 차별 속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일제하에 일본으로 건너가 평생을 제일 한국인들과 함께 살았던 한 재일동포의 회고록에 의하면 “일본인이 제일동포를 조센징이라 부르며 경멸하던 제국주의 시대의 일본인 시각은 과거와 다를 바 없이 계속되었다. 닌니꾸 구사이, 닌니꾸 구사이(마늘 냄새 난다. 마늘냄새). 재일동포는 셋집도 구하기 어려웠다. 재일동포학생은 학교에서도 일본인 학생이 기피하는 왕따였다..... 재일동포 일본에 등지를 틀며 낯선 환경에 차별대우 등의 설움을 겪으며 살아왔고, 특히 일제말기 그 혹독한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았다.” 이런 비극이 한국에 살고 있는 외국인 이주민에게 반복해서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하와이와 미주 지역의 한인의 상황
미국으로 이민한 역사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1기는 1903년부터 1905년까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간 노동 이민으로부터 시작하여 2차 대전이 끝나는 1945년까지의 시기입니다. 2기는 1945년부터 1965년까지로 전쟁고아와 미군과 결혼한 전쟁신부 이민, 그리고 유학이민이 시작되었던 시기입니다. 3기는 1965년부터 현재까지로, 개정된 이민법에 따라 한국인들이 연간 2만 명 한도를 배당받으며 본격적인 가족 초청이민과 취업이민이 지속되었던 시기입니다.
첫째, 1903-1905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간 노동이민자는 이글거리는 태양아래서 새벽 4시 반부터 매일 10시간씩 중노동을 해야 했으며, 이름 대신 번호로 불렸고, 게으름을 피우면 회초리로 맞을정도로 반노예적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둘째, 한국전쟁 이후 전쟁고아와 전쟁신부, 혼혈인들의 미국행이 많아졌습니다. 한국에서 전쟁고아와 전쟁신부, 혼혈인들이 겪는 차별과 정신적 고통은 매우 심했기 때문에 이들은 미국행을 희망했습니다. 혼혈에 대한 편견과 증오 때문에 혼혈인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주한 한 여인의 고백은 이러했습니다. “한국에서 혼혈인으로 살기는 너무나 어려웠다. 나는 그래도 참고 살 수 있었는데, 내 자식까지 똑 같은 설움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 같은 인간으로 만들지 않으려고 미국행을 결심했다.”
셋째, 1992년 4월 29일 LA 폭동은 다민족 사회의 모범이라고 자랑했던 천사의 도시에서 약탈과 방화, 총격전으로 전쟁터로 돌변했습니다. 흑인들이 한인업소 2280 여개에 방화하고 약탈을 자행하는 인종폭동이 발생했습니다. 4·29 폭동은 흑인, 백인과 한인, 멕시칸, 아시안, 라티노등 다인종 모두가 피해자와 가해자로서 폭동에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참여했던 미국 최초의 다인종 폭동사건이었습니다.
4·29 폭동은 다인종 다민족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깨우쳐주는 사례가 되었습니다. 특히 여러 민족 집단 간에 문화적 충돌이 일상적으로 벌여졌고, 한인들은 미국의 다른 민족들로부터 오해와 편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흑인들 및 다른 민족 집단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지혜가 부족했습니다. 한인들은 문화 차이를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흑인들로부터 증오와 적대감을 촉발시키기도 했습니다. 한인들은 흑인이나 다른 소수민족에 대한 편견이 심하고 배타적이기도 했습니다. 백인들에게는 필요이상으로 저자세를 취하고 흑인이나 라틴계의 이민자 집단에는 고압적인 자세로 이들을 무시함으로써 화를 키웠습니다. 타민족에 대한 멸시와 무례, 차별은 인종갈등을 초래했고, 4·29 LA 폭동 사건은 다른 민족과 더불어 사는 지혜가 없었던 한인들이 국제사회에서 어떤 일을 당할 수 있는 지를 보여주었던 사건입니다.

5. 멕시코와 남미의 한인 상황
멕시코를 미국으로 알고 떠났던 한인 1033명이 장장 1개월 반 동안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은 멕시코의 살리나르쿠즈항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다시 기차와 배를 이용하여 메리다에 도착한 한인 이민자들은 유카탄 반도 전역에 있는 에네켄농장 22개에 흩어져서 무더위와 굶주림 속에서 4년간의 강제노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메리다에 거주했던 중국인 한 남자의 편지 내용을 보면 한국인이 얼마나 비참하고 힘들게 지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멕시코 원주민인 마야족의 노예등급이 5에서 6등급이고 한인 노예는 7등급으로 가장 낮은 값이다. 조각이나 떨어진 옷을 걸치고 짚신을 신었다. 아이를 팔에 안고 등에 업고 길가를 배회하는 한국 여인들의 처량한 모습은 가축같이 보이는데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지경이다. 농장에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무릎을 꿇리고 구타해서 살가죽이 벗겨지고 피가 낭자한 농노들이 그 비참한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다.”
그 당시 그 곳의 돼지 한 마리 값이 80전이었는데 한국 노동자 한 사람의 몸값은 불과 30전이었다고 합니다.

6. 독일로 간 광부와 간호사 유럽의 입양아들
독일의 경우에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서독에 파견된 광산 근로자와 간호사들이 계약 기간이 끝난 뒤에도 계속 독일에 머무름으로써 유럽에서는 예외적으로 정착 한인수가 일시적으로 체류자를 넘어서는 유일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또한 유럽 국가에서 특히 한국의 입양아들이 서양의 양부로 밑에서 성장한 사례가 많았습니다. 이들 입양아들의 성장과 생애사 사례들은 이중 정체성 사이에서 이들이 겪는 심리적 물리적 고통과 방황, 극복과정을 감동적으로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양부모와의 관계와 사회생활에서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하고, 찢어진 눈과 중국인으로 불리는 경멸감, 서양인과 다른 생김새로 인한 따돌림을 당하기도 합니다.
독일로 간 광부들은 20 Kg이 넘는 착암기를 들고 경사진 지하 막장에서 하루3교대로 채탄 작업을 했습니다. 다양한 타민족 광부들 사이에서 소수민족인 한국인들은 많은 차별을 받았습니다. 터키인들과 달리 한인들은 노동조합도 없었으며 체력은 약했고 상대적으로 고학력자들이 많아 광산업에 적응하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우리의 부모와 선조들이 가난할 때 해외에서 배우고 깨달은 값진 교훈을 참으로 소중합니다. 그 중에서도 차별과 편견이 이주민들에게 가장 아픈 상처를 준다는 점 이주민들과 더불어 살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가 살기 좋은 선진국이라는 점입니다. 외모의 차이와 경제의 차이, 역사 경험과 문화 차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이 동일한 인간으로서 차별받지 않고 살아갈 권리가 있으며 인격과 존엄성 인권을 지닌다는 점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런 해외 디아스포라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우리가 이렇게 억울한 무시와 차별을 당했다고 한다면 이런 처지와 형편에 처해있는 국내 이주민들을 이런 취급을 당하지 않도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런 역지사지의 태도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황금율의 교훈을 적용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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