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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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강연은 백양로교회(김태영 목사)작은도서관 꿈여울에서 지난 10월28일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여 신간 ‘마르틴 루터’의 저자 이길용 교수(서울신대)를 초청하여 개최한 제2회 북콘서트 「근대의 문지기, 마르틴 루터」를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루터(Martin Luther, 1483~1546)하면 사람들은 대체로 납덩이처럼 무겁고 진중한 사내를 생각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견고하고도 거대한 단일 대오를 이루고 있던 중세 가톨릭 세계에 홀몸으로 저항했던 사람으로 그를 기억한다면, 그처럼 무겁고 진중한 모습의 사내를 그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 속 루터는 그렇게 회색빛으로 무장한 근엄한 어른만은 아니었다. 라틴어에 능숙했지만 당시 민중이 사용하던 독일어를 끔찍이도 사랑했고, 심지어 대학 강의실에서 교육을 목적으로 한다면 욕설도 마다하지 않던 파격적인 선생이 바로 루터였다. 물론 그 때문에 교수의 품위를 떨어뜨린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루터의 욕설 행진은 쉬 입술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빡빡했던 수도사로서의 일정 때문인지 그는 종종 변비로 고생하였고, 그 때문에 찡그린 인상에 짜증 또한 만만치 않던 괴팍한 성격의 사내이기도 했다. 오죽하면 평생 제자이자 동지로 종교개혁이란 고단한 여정을 함께했던 멜란히톤(Philip S. Melanchthon,1497~1560)조차 루터가 사망한 후, 생전 그의 표독스러운 독설과 짜증에 적지 않은 상처를 받았다고 푸념을 늘어놓았을까. 이처럼 현실에서 만나는 루터는 매우 인간적이고 소박하며, 쉽게 길 위에서 만날 수 있는 모습의 사내이기도 했다.
 
 종교개혁은 해석학적 운동
 이렇게 평범한 사내 루터가 어떻게 중세를 마감하고 근세를 여는 ‘종교개혁’의 주인공으로 나설 수 있었을까? 예서우리는 종교개혁에 대한 역사-문화적 의미를 다시 새길 수 있어야 한다. 흔히 우리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종교 조직의개선’으로 여긴다. 그래서 ‘가톨릭’이라는 낡은 제도를 뒤로하고, ‘프로테스탄트’라는 새로운 것을 앞세운 사람이 바로 루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루터가 개혁하려고 한 것은 종교란 ‘제도’가 아니다. 그가 사용했던 ‘종교’(religio)란 낱말은 지금 뉘앙스와는 사뭇 다르다. 지금의 종교란 단어는 오랜 세월을 거치며 조직과 제도, 그리고 실체의 옷을 입게 되었다. 따라서 종교하면 유교, 불교, 도교, 그리스도교 등 개별 종교‘들’을 쉽게 떠올린다. 마치 레고의 여러 블록처럼 따로 존재하며 자신의 영역을 유지하는 구체적인 실체‘들’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처럼 지금은 종교란 말을 복수로 인식하는데 특별한 저항을 갖지 않는다.
 하지만 루터가 사용한 종교란 말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것처럼 실체적 조직이라기보다는 ‘경건함’, ‘믿음’, ‘신앙’, ‘신실함’ 등으로 이해되었다. 이런 용례를 십분 이해하고 종교개혁을 조망한다면, 루터는 이 운동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조직을 개선하고 바꾸려 했던 것이 아니라, 신의 임재와 은총, 그리고 구원에 대한 기존 교회의 ‘믿음’, 즉 ‘해석’을 바꾸려 했던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종교개혁은 일종의 ‘해석학적 운동’이며, 그렇게 루터는 당시 가톨릭이 독점한 성서와 신앙적 세계에 대한 해석권을 찾아오려 한 것이다!
 
 ‘내’가 만난 신, 드디어 주체가 된 ‘나’
 이때 루터가 주목한 것은 구원의 문제였다. 유한하고 부패성이 가득한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신과의 만남이 필수적이다. 당시 사람들은 신에게 다가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지상의 대리 조직으로서 교회와 사제계급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람은 단독으로 절대 신을 만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은 위대하고, 장엄하며, 초월적 존재이기에 하찮은 무지렁이 인간은 단독으로 그를 직접 만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제와 그들이 머무는 교회란 조직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중세 사람들에게 그것은 당연하고, 또 본질적인 것이라 생각되었는데, 이런 시대정신이 ‘그리스도 신앙으로 단일한 보편국가’(res publica christiana)인 중세의 버팀목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에 ‘나’는 없었다. 지금 당장 불안에 떨며 고통 속에 절망하는 ‘나’는 참으로 절절한 실존임에도, 결국 개인은 교회라는 ‘집단’에 묶여야만 신을 만날 수 있고, 또 그들의 해법에 충실해야 ‘믿음’과 ‘구원’을 허락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 루터의 조급함이 터져 나온다. 도대체 왜 인간은 단독자로서 신을 만날 수 없는가? 그리고 교회는 제대로 우리를 대변하며 신의 임재를 보장하는 현장이라 할 수 있는가? 왜 신은 이런 복잡한 과정을 우리에게 강요하는가?
  반복되는 루터의 항변은 결국 하나의 목적에 다다르게 되었다. 바로 ‘나’이다.
‘내’가 신을 만나고, 신이 ‘나’를 찾아오고, ‘내’가 신을 믿고, 신이 ‘나’를 구원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구원은 ‘나(주체적 개인)와 너(신)’의 관계이지, 이들을 중개하는 어떤 조직이나 기관도 필요 없다는 확신을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좁은 방에서 증득하게 된다. 신은 공포와 불안을 조성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에게 구원을 건네기 위해 찾아오는 ‘사랑의 존재’이다.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신의 은총을 위한 매개체가 필요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루터가 발견한 신은 심판하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사랑과 자비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홀로’ 신 앞에 다가설 수 있게 된다. 신은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인간은 ‘나’라는 존재로 그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루터에겐 적어도 신앙과 구원을 위한 길에 교회와 사제계급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은 아니게 된 것이다. 오직 ‘신’과 ‘내’가 필요할 뿐이다. 이렇게 루터는 ‘나’라는 ‘주체적 자아’를 전면에 내세울 수 있었다. 그 결과 집단이 내 앞에 서던 중세적 가치관이 허물어지고, 신앙과 종교생활의 영역에서 ‘나라는 주체’가 강조되기 시작했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가 ‘의심하는 자아’를 주장하기 백여 년 전에 이미 중세 독일의 한 사내가 ‘주체적 자아’를 ‘종교적 체험’을 통해 세상에 내놓았던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루터는 여전히 중세시대를 살았고, 중세적 마인드에 묶여 있었긴 했지만, 종교개혁가를 넘어 위대한 사상가로 우뚝 서게 된다.
 
 독일어 표준화를 불러온 성서번역
 루터의 유산 중 무엇보다 앞에 꼽아야 할 것은 아마도 ‘성서번역’일 것이다. 하지만 성서번역만으로 따지면 루터가 최초의 인물은 아니다. 루터 이전에 이미 18종의 독일어 번역본이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루터의 성서가 가지는 의미는 초지일관했던 번역 원칙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루터는 보통사람도 손쉽게 읽을 수 있는 성서를 펴내길 원했다. 그의 간절한 소망은 다음과 같은 그의 고백에서도 잘 드러난다.
 “밖으로 나가 가정의 아낙네들, 거리의아이들, 시장의 보통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봐야 한다. 그들이 어떻게 말하는지 잘 보았다가 그런 식으로 번역을 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내 말을 이해할 수 있고 내가 자기들에게 독일어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제임스 레스턴 저, 서미석 역, 《루터의 밧모섬》, 이른비, 2006. 187쪽에서 재인용)
 이러한 루터의 번역 원칙은 당시 다양한 지역 방언으로 통일성이 없던 독일어의 표준화를 가능하게 했다. 또한 루터가 성서를 번역하면서 사용했던 몇몇 문장은 독일어의 관용적 표현으로 지금까지 사용될 정도이다. 더 나아가 루터의 성서번역은 독일 민중에게 자국어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이는 독일 민족주의의 구심점이 되는데 영향을 주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독일에서 루터와 민족주의는 매우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실제로 19세기 독일에서 민족주의가 득세했을 때 우후죽순처럼 각지에 루터 동상이 세워지기도 했다. 루터의 성서번역은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에도 그 영향력이 확산되어 갔다. 그래서 루터의 모범을 따라 영어, 프랑스어 등 다양한 자국어로 성서가 번역되기 시작하면서, 독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는 각 나라의 민족주의 득세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이처럼 루터의 성서번역은 종교계뿐만 아니라 독일과 유럽 전역에 민족주의를 불러내는 촉매역할을 제대로 해냈다.
 
 우리 모두가 사제다!
 루터가 주창한 ‘만인 사제주의’ 역시적지 않은 영향을 후대에 남겼다. 만인사제주의란 신의 은총을 인간에게 매개해주는 계급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선언이다. 즉, 누구든 신 앞에 나아가 기도할 수 있고, ‘순전한 믿음’(sola fide)에 의지해 신의 은총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루터의 이 선언은 그동안 교회 내에 견고하게 똬리를 틀고 있던 성직과 평신도의 구별을 해체하며, 더 나아가 사회 시스템에 민주적 요소를 확산하는데 주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교회 안에서 차별은 있을 수 없다. 모든 신자는 동일한 자격의 ‘그리스도인’일 따름이다. 거기에 성직자과 평신도라는 구분은 존재할 수 없다. 신 앞에 신앙의 ‘금수저’란 존재하지 않는다. 신 앞에 만인은 평등하며, 구원의 가능성 역시 모두에게 동등하다. 각자의 능력과 역할에 따라 직분은 달라질 수 있겠지만, 그것이 곧 교회 내 본질적 계급은 될 수 없다고 루터는 강변했다. 따라서 더 이상 교회내 성직은 존재할 수 없다! 물론 루터가 분명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이 주장을 펼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후 만인 사제주의는 서구식 개인주의와 민주제 도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여성에게도 교육을!
 루터의 만인 사제주의는 공교육의 필요성을 부각시키기도 했다. 왜냐하면 사제계급의 도움 없이 신을 제대로 만나기위해서는 결국 성서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서는 쉬운 민중어로 번역되어야 하고, 사람들은 이 언어를 읽을 수 있도록 훈련받아야만 했다. 당시 독일어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이 10% 미만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루터의 교육에 대한 강조는 신앙적으로도 매우 중요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루터가 생각했던 교육은 스스로 성서를 해독할 수 있는 능력 함양에 방점이 찍혀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루터는 개혁 교회가 세워지는 곳마다 학교와 도서관을 세웠고, 더 나아가 여성들에게까지 교육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공교육의 장을 확대한 교육가이기도 했다.
 
 루터의 그림자…
 서구의 역사에서 루터가 남긴 자취는 지대하다. 종교영역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그의 영향은 크고 지속적이며, 또한 혁신적이었다. 하지만 그 모두 루터스스로 기획한 것은 아니다. 중세 독일의 작은 동네에서 수도사요 교수로서 일하고 있던 루터는 단지 자신이 체험한 신앙적 깨우침에 진솔하게 반응하고자 했던 것뿐이다. 그리고 루터의 열망은 그만의 것도 아니었다. 이미 영국의 위클리프, 보헤미아의 얀 후스, 15세기의 신비주의운동, 그리고 독일과 네덜란드의 ‘공동생활 형제단’과 토마스 아 켐피스 등 그와 같은 고민을 한 선각자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의 열망이 제대로 세상에 목소리를 내기까지는 시간적 성숙이 필요했다. 루터는 바로 그 ‘때’를 제대로 타고 났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가 교수신분이었고, 라틴어와 고대 그리스어에 능통했다는 점. 그리고 그런 능력을 통해 성서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는 점 등이 그의 발언에 힘을 실리게 했고, 마침 독일지역에서 확산되기 시작한 활자 인쇄술은 그의 동기에 실질적 힘을 실어주는데 큰 역할을 했다. 아울러 여러 전쟁(백년전쟁, 장미전쟁 등)과 페스트의 대유행, 그리고 가톨릭교회의 분열과 인문주의의 득세 등이 루터의 지원군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여러 안팎의 요소를 떼어내면 꽤나 보수적인 수도사의 모습을 지닌 루터가 눈에 들어올 뿐이다. 그는 결코 농민들의 편에 서지 않았고, 주로 영주들의 힘을 빌려 자신의 개혁사업을 완수하려 하였다. 그리고 종교개혁 역시 각개인의 자유로운 신앙 선택으로 귀결되지는 않았다.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Augusburg)에서 있었던 가톨릭과 개신교의 화의(和議)는 “영주의 종교가 그 지역의 종교이다”(cuius regio, eiusreligio)라는 말로 정리된다. 이 말은 교황과 결탁한 황제에 맞선 봉건 영주의 부분적 승리로 해석된다. 따라서 영주가 선택한 종교가 그 지역의 종교로 인정될 뿐이었다. 이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가지는 한계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개신교를 뜻하는 프로테스탄트란 용어역시 1529년 슈파이어(Speyer)에서 있었던 제국 회의에서 루터의 파문을 결정했던 보름스 칙령이 다시 확증되자 루터를 지지했던 영주들이 제출한 항의문의 제목에서 유래한다. 이 역시 영주와 황제간의 논의였지, 민중은 배제되어 있었다.
  루터의 순결한 윤리적 기준은 필립공의 이중 결혼을 묵인해주었다는 점에서 색이 바래지기도 했다. 필립은 헤센의 지배자로 루터의 종교개혁을 적극 지지했던 영주였다. 결국 루터는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원칙을 저버린 오류를 범한 셈이다. 또한 그의 집요한 유대인 혐오주의는 나치 시절 반유대인 선전용으로도 사용되기도 했다는 점 또한 잊기 어려운 오점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역시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 루터의 자리는 16세기 인쇄업이 꽃피던 라이프치히라는 도시를 옆에 끼고, 바티칸으로 막대한 자금을 송금하는 것에 진저리를 치던 독일 선제후가 통치하고 있던 비텐베르크가 안성맞춤이었다. 만약 그가 전혀 다른 환경과 시대에 등장했더라면, 그저 성질 괴팍하고 상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 융통성 없는 보수 신앙인으로 한 평생을 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을 사는 우리도 종교개혁 오백년의 의미를 되새기기위해 ‘루터’라는 한 개인에게만 집중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그보다는 그가 ‘어떤 시대’, ‘어떤 문화’, ‘어떤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그런 일을 했는가를 반복하여 물어야 할 것이다. 결국 인간은 ‘역사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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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인간적이고 소박했던 사내, 마르틴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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