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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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인상파 화가 르느와르(Renoir)는 양손과 다리가 마비되는 악성 관절염으로 고생했습니다. 붓을 잡는 것조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하지만 르느와르는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결코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열정은 더욱 뜨거워만 갔습니다. 어느 날 절친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가 그를 방문했습니다. 누워있거나 휠체어에 앉아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마티스는 깜짝 놀랐습니다. 르느와르가 연필을 붕대로 감은 채 그림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을 하나하나 그을 때마다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지만 결코 그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마티스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오, 르느와르. 이렇게 고통을 받으면서까지 그림을 그리다니, 이제 그만 쉴 생각은 없나?” 그러자 르느와르는 대답했습니다. “고통은 순간이지만 그림의 아름다움은 영원히 남는다네.”
고통의 화가라면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를 빼놓을 수 없죠.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을 가난과 우울증 속에서 처절한 고통과 싸우면서도 붓을 놓지 않았던 고흐는 그야말로 걸작들을 후대에 남겼습니다. 지난 8일 미국 캔자스시티 넬슨 앳킨스 박물관 측은 소장하고 있던 그림에 대한 정밀 분석 작업을 벌이던 중 고흐의 그림 <올리브 트리>에서 말라붙은 메뚜기의 날개 일부를 확인했습니다(Fox news). 박물관의 큐레이터이자 메뚜기의 발견자 메리 쉐퍼는 “실외에서 완성된 그림에서 곤충이나 식물이 발견되는 일은 흔하다”라고 했습니다. 고흐 역시 1885년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야외에 앉아 그림을 그리면 캔버스에 파리와 모래와 먼지 때문에 긁힌 자국이 생긴다”라고 썼고, 실제로 이번 작품도 1889년 프랑스 생 레미의 야외에서 작업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렇게 128년의 세월이 흘러 발견된 메뚜기의 흔적은 화가 고흐의 고충과 고통을 말없이 대변하고 있습니다.
같은 날 대한민국 국회에서 열린 헌법재판관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에서도 또 하나의 ‘그림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후보자의 장인이자 한국화단의 원로작가 민경갑 화백의 작품이 법원이나 헌재에 22점(약 2억)이나 걸려있는 사실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헌재가 소장한 71점의 예술작품 중 한 개에 불과하고, 나머지 21점도 돈을 주고 구입한 작품은 9개에 불과하다는 반론도 제기되었습니다. 현재 예술원회장을 맡고있는 민 화백은 지난 62년 동안 창작 한국화의 외길을 달려 온 것으로 유명합니다. “자기 작품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그리는 것은 그냥 그림일 뿐이며, 창작을 하지 않는다면 단순한 화공에 불과하다. 죽을 때까지 창작하고 그려야 화가라고 할 수 있고, 진정한 작품 평가는 후대에 결정되는 것이다.” 평소에 그가 남긴 말들을 생각한다면, 생존해 있는 동안 그것도 국회에서 벌어지는 그림 논쟁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을듯합니다.
노경상은 그림이란 단순한 베낌이 아니라 표현(表現)이라고 했습니다. 영감(inspiration)을 받고 통찰(insight)을 가지고 직관(intuition)을 사용하는 과정이라고도 했습니다. 여기에 상상력(imagination)이 가미되고 몰입(indulgence)의 시간이 투입(input)되어야 하겠지요. 물론 전문가와 비할 바는 아니겠습니다마는, 사람은 누구나 회화로서의 그림만이 아니라 심상으로서의 화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영감과 통찰과 직관과 상상으로 어떤 몰입의 과정을 거쳐서 자기만의 삶을 표현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지금 어떤 그림을 그려가고 있으며, 먼 훗날 후대에 어떤 작품으로 남게 되겠습니까? 문득 고개를 들어 가을하늘을 바라보니 감탄사가 절로 납니다. 남양군도에서 바라본 산호의 바다 또한 눈부시게 아름다웠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고흐의 메뚜기와는 비교할 바가 없는, 이토록 아름답고 위대한 대자연이라는 작품을 남기신 조물주의 흔적들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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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조물주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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