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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샹규 교수의 부산기독교이야기 13] 게일이 본 데이비스의 마지막 날들
2017/08/07 15:07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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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때 이창직은 게일보다 3년 연하인 22세였다. 해주의 양반가문의 사람으로 소래교회 교인으로서 한학자였던 이창직은 유능한 청년이었고, 게일의 어학 선생이 된다. 후일 게일의 선교사역, 특히 성경번역을 도왔던 조력자였고, 게일의 가족처럼 일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1889년 6월 이창직과 함께 서울로 돌아온 게일은 약 2개월 동안 언더우드를 도와 한영사전을 편찬했고, 「텬로역정」 번역사업에 참여하고(1892), 성경번역위원이 되어 성경번역에 참여하였다(1906). 그가 게일을 도와 번역한 책이 「유몽천자」, 「예수의 재림」 등이다.
1889년 8월 게일은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향하게 된다.
게일은 어학선생 이창직과 일본인 소년 쿠사바 카츠타로와 동행하여 제물포로 가서 일본 증기선 ‘히꼬 마루’(Higo Maru)로 부산으로 향했다. 그가 서울과 원산에 일시 거주했으나 처음 정착한 곳은 사실은 부산이었다. 그는 선교사가 없는 부산에 정착할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때부터 부산항과 일본인 거류지 사이에 위치한 초량에 살았는데, 러트는 게일이 이때부터 1891년 봄까지 약 1년 반 동안 부산에 체류했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정확하지 않다. 게일이 1890년 12월 1일자로 파송기관인 토론토대학 YMCA에 보낸 편지에서 이미 자신은 서울에 와서 한국인의 배려로 한옥에 거하고 있다는 기록하고 있다. 이 점을 고려해 볼 때 때 적어도 1890년 12월 이전에 부산을 떠났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게일의 부산 체류 기간은 1889년 8월 이후 1년 남짓한 기간이다. 게일이 1890년 12월 이전에 부산을 떠나 서울에 거주하고 있었음은 윌리엄 베어드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891년 1월말 내한한 베어드는 2월초 서울에 체류하던 선교사들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게일도 서울에 거주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게일이 부산에서 일했던 기간 중의 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이 점에 대해 성공회신부로서 서울에서 일한 선교사이자 한국학 연구의 대가였던 리차드 럿트(Richard Rutt, 1925-2011)도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보면 나의 자료 섭렵의 부족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문필가이자 자신의 활동에 관한 다양한 기록을 남긴 게일이 부산에서의 생활에 대한 기록의 결여는 무슨 연고일까? 그의 부산 체류기간이 짧았고 특히 부산 체류 기간 중 한국어 공부에 전념하여 선교를 위한 구체적인 노력이 없었던 탓일까? 자신의 활동에서 특기할 사항이 없어서였을까? 어떻든 그는 부산에 주재한 장로교의 첫 선교사로서 이 지역 선교를 위한 탐색과 연구의 기간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그가 부산에 체류하는 동안 호주의 첫 선교사 데이비스(J. H. Davies)가 부산으로 왔다. 데이비스의 최후의 순간을 지켜보았고 또 그를 매장한 이도 게일이었다. 이 때의 상황에 대한 게일의 기록은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889년 10월 2일 부산을 거쳐 제물포(10월 4일)를 지나 서울로 갔던 데이비스가 약 6개월간 서울에서 언더우드와 함께 지내며 조선어를 공부한 후 3월 14일 서울을 떠나 부산에 도착한 날은 1890년 4월 4일이었다. 그러나 이전 5일간은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천연두에다 폐렴까지 겹쳐 건강은 회복되기 어려웠다. 일본인 호텔에 여장을 풀었으나 삶과 죽음의 길목에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데이비스는 어렵게 게일에게 전갈을 보내 “빨리 와 달라”고 부탁했다. 게일은 즉시 그에게 달려가 그를 자기의 거처로 옮겨왔다. 그리고는 일본인 거류지의 일본인 의사 키타무라(Kitamura)의 왕진을 청해 치료를 요청하고 그를 다시 일본인 병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이튼 날인 4월 5일 오후 1시경에 데이비스는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게일은 이 날의 상황에 대해 한통의 편지글을 남겼다. 즉 부산으로의 여행에 동참하지 않고 서울에 남아 있던 데이비스의 누나 메리(Mary T. Davies)에게 데이비스 목사의 죽음에 대해 쓴 1890년 4월 6일자의 편지는 한 선교사의 부산 도래와 죽음에 대한 생생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데이비스가 사망하자 게일은 그를 부산 앞바다가 훤히 굽어보이는 복병산(伏兵山)에 매장했다. 이로부터 18년이 지난 1908년 게일은 이렇게 회상했다. “얼굴이 까무잡잡한 한국인 한두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나는 한국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마친 이 용기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 데이비스가 남긴 모든 것을 멀리 떨어진 외로운 언덕바지에다 묻었다.” 데이비스의 죽음은 젊은 선교사 게일의 여정에서 선교가 무엇이며 어떤 희생을 요구하는 것인가를 깊이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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